도기천기자 |
2013.12.19 09:30:18

(CNB=도기천 정경부장) 한전이 10여년 동안 야심차게 추진해온 경량전주 보급사업을 사실상 접었다. 본지는 한전이 사업을 포기하게 된 경위를 지난 13일 <[단독] 베일에 쌓인 한전 ‘전봇대 재판’ 불편한 진실> 제하의 기사를 통해 심층보도 한 바 있다.
경량전주는 기존 콘크리트전주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친환경성, 경제성을 지닌다.
콘크리트 전주는 수명이 30년에 불과해 폐기물 처리비용만 매년 100억원 가까이 든다. 2000kg이 넘는 무게로 인해 설치가 까다롭고, 천재지변이나 교통사고시 인명을 위협하고 있다.
반면 창원기능대 김조권 교수가 국내 최초로 개발한 FRP재질의 경량전신주는 100% 재활용이 가능해 처리비용이 발생하지 않고, 수명도 80년이라 경제성이 높다. 무게가 350kg(16m기준)에 불과해 두 사람이 들 수 있어 운반·설치가 용이한데다 100% 부도체라 감전사고의 우려가 없다.
전국 800여만개의 콘크리트 전주가 경량전주로 대체된다면 한전의 에너지정책은 물론 도시환경·건설 분야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량전주 보급사업 왜 접었나
하지만 한전은 지난 2010년 김 교수의 새 전봇대를 ‘배전용 FRP전신주’라는 이름의 신개발기자재로 채택해 놓고도 보급을 지연시켰다.
‘특정인의 기술이 필요하거나 해당 물품의 생산자가 1인뿐인 경우 등 경쟁이 성립될 수 없는 경우 수의계약을 할 수 있다’는 국가계약법 시행령 26조를 무시한 채, 최저가 공개입찰을 통해 무자격업체를 FRP전봇대 납품업체로 선정했다.
그 업체 사장은 ‘FRP전주’가 뭔지도 모르고 입찰에 참여했다고 고백했다. 기존 콘크리트전봇대 부속품이나 납품하던 업체였는데, 얼떨결에 입찰에 참여했다 최저가로 낙찰됐다는 것.
당연히 생산품은 한전 검수과정에서 불량품으로 판명났고, 몇차례 시도를 거쳐 겨우 성능테스트를 통과해 100여기를 납품하다 손을 들었다. 기술력이 부족한데다 생산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손실을 떠안고 납품을 중도 포기한 것이다.
애초 FRP전봇대를 개발해 한전에 시범납품했던 김조권 교수는 이런 알 수 없는 한전의 태도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 3년 가까이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한전은 재판정에서 “전신주는 ‘구조·성능이 단순한 일반품목’으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공개입찰을 했다”는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한전은 2011년 재입찰을 시도했지만 응찰업체가 한곳도 없었다. 납품하다 중도 포기했던 업체는 전년도 입찰 때 보다 두 배 높은 생산단가를 제시했다. 결국 한전은 지난해부터 경량전주 보급사업을 접었다.
기자는 취재 초기 때만해도 한전이 국가계약법을 너무 곧이 곧대로 적용해 공개입찰이 진행된 것으로 생각했다. 공무원의 무사안일(無事安逸)주의가 이런 사태를 초래한 줄 알았다. 한전 관계자도 “전봇대가 일반품목인데 수의계약을 하면 오해받을 수 있어 투명하게 하기 위해 공개 입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 할수록 의문은 커져갔다. 기술력이 단순한 기존 콘크리트전봇대를 기준으로 ‘전신주=일반품목’으로 규정해 놓은 것을 김 교수가 독자 개발한 FRP경량전주에 적용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현행 국가계약법 시행령 세부항목 중 김 교수가 수의계약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되는 조항은 ▲특허공법을 적용하는 공사 ▲‘전력기술관리법’에 따른 신기술을 적용하는 공사로서 사실상 경쟁이 불가능한 경우 ▲해당 물품을 제조·공급한 자가 직접 그 물품을 설치·조립 또는 정비하는 경우 ▲해당 물품의 생산자 또는 소지자가 1인뿐인 경우로서 다른 물품을 제조하게 하거나 구매해서는 사업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 등 3~4가지나 된다.
한 가지만 만족해도 수의계약 할 수 있다. 한전 또한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당시 김 교수와 수의계약 가격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친환경 에너지 정책 ‘절실’
그랬던 한전이 돌연 국가계약법을 어기면서까지 김 교수의 전봇대를 포기한 이유는 뭘까?
이는 한전이 기존 ‘콘크리트 산업’이라는 거대 장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콘크리트 전주는 수명이 30년이라 해마다 교체되는 전봇대가 수만여개에 이른다. 3000kg 가까운 콘크리트 덩어리를 세우거나 철거하는 데는 상당한 인력과 장비가 투입된다. 운반과 폐기도 마찬가지다.
김 교수의 FRP전주로 전국의 전봇대를 대체하자는 논의가 오갈 때 즈음 이명규 의원은 국회에서 “콘크리트전주협회가 한전에 엄청난 로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 김 교수는 “한전 담당 직원이 ‘교수님 혼자만 먹지 말라’는 투의 농담을 하기에 느낌이 이상했다”고 전했다.
이래저래 앞뒤 상황을 종합해보면 뭔가 ‘보이지 않은 손’이 작용했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밀양송전탑 앞에 드러누운 주민들을 보면 자꾸 김 교수의 전봇대가 어른거린다. 애꿎은 목숨 여럿을 앗아간 밀양송전탑 사태가 주는 교훈은 뭘까?
결국 인간과 전신주가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다. 한전이 외압을 물리치고 적극적인 자세로 친환경 경량전주 사업을 진행했더라면 밀양송전탑 사태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송전탑과 전봇대는 차원이 달라’라고 말하기 전에 ‘친환경 에너지 소재’에 대한 관심을 더 가져주길 바란다. 그것이 제2의 밀양사태를 예방하는 지름길일지 모른다.
- 도기천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