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기천기자 |
2014.02.10 16:19:17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안에 있는 KT ENS 본사 빌딩. (사진=연합뉴스)
피해 눈덩이…부정대출 규모 3000억원으로 커져
‘사기·횡령’인지 ‘금융사고’인지 구분조차 어려워
KT vs 금융권 “서로 네탓” 책임공방 ‘점입가경’
이번 사건은 KT의 네트워크 엔지니어링 분야 전문 자회사인 KT ENS의 김모 부장(51)이 협력업체들과 짜고 세금계산서 등을 조작해 허위 매출채권을 발행한 뒤, 협력업체가 이 매출채권을 담보로 시중 은행들로부터 3000억원에 이르는 부당대출을 받아오다 지난달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에 적발되면서 알려졌다.
김씨는 지난 2008년 5월부터 최근까지 100여차례에 걸쳐 KT ENS에 납품하는 협력업체 6개사에 통신장비 등을 실제로 납품받지 않았으면서도 납품받은 것처럼 세금계산서를 위조해 발행했다. 시중은행 3개사와 저축은행 14개사 등 모두 17개사가 위조된 채권에 속아 수천억원대의 대출을 해줬다.
이들은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을 이용해 금융권을 농락했다.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은 납품 업체가 원청업체에 물품을 납품한 뒤, 구매 대금이 입금되기 전에 미리 발행한 세금계산서를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는 방식이다. 과거 어음제도가 활성화 됐던 시절, 납품 업체가 원청업체로부터 어음을 받아 은행에 할인(일종의 어음담보대출)을 받아온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금융사들은 이미 세금계산서가 발행된 만큼, 늦어도 3개월 내에 KT 측이 협력업체에 납품대금을 입금할 것으로 봤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 없이 자금을 대출해 줬다.
대출 과정에는 채권양도 수법도 동원됐다. 협력업체들은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워 허위채권을 SPC에 양도한 뒤, SPC가 금융사들로부터 대출을 받는 절차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SPC는 채권 공증, 지급보증보험 등을 활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한마디로 ‘가짜채권’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정교한 세탁절차를 거친 것이다.
▲금융감독원. (사진=연합뉴스)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과거 대형 금융사기 사건들처럼 횡령을 염두에둔 계획적인 사기 행각이냐, 아니면 대출돌려막기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부정대출이냐다.
금감원은 저축은행의 불법대출을 예방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운영하고 있는 ‘저축은행 여신 상시감시시스템’을 통해 이번 부당대출을 적발했다. 지난달 모 저축은행의 여신 중 차주는 두 곳인데 전화번호가 동일한 대출건이 상시감시시스템에 포착돼, 해당 저축은행에 대한 실사에 나선 결과 이번 대출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금감원에 따르면, 은행들로부터 돈을 빌린 협력업체들은 대출만기가 도래하면 돌려막기 형태로 대출을 상환해 왔다. 금융당국은 최초 대출이 이뤄진 2008년경부터 어느 시점까지는 정상적인 대출 및 상환이 이뤄지다 특정 시점부터 가짜 매출채권을 만들어 부정대출을 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대출만기가 도래했지만 대출금을 갚을 여력이 되지 않는 상황에 처한 협력업체들이 원청업체인 KT ENS의 자금담당 직원인 김씨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때부터 조작된 채권이 발행됐을 것이라는 게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이후 해당 채권의 만기가 도래하자 다시 허위채권을 발행해 타금융사에서 대출받는 수법으로 ‘돌려막기’를 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선 이들의 고의성 여부를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김씨는 허위 채권을 발행해주는 대가로 협력업체들로부터 법인카드와 차량 리스비 등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9일 구속된 상태다. 이 정도 대가로 김씨가 사기·횡령에 가담했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경찰과 금융당국도 이런 점을 고려해 협력업체 대표들은 긴급체포하지 않고 소환조사하고 있다. 이들이 순순히 소환에 응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기행각을 벌였다고 보기에는 석연찮다.
법조계에서는 대출금의 용처, 향후 상환여부에 따라 사기죄 성립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대출을 받은 협력업체들이 부당하게 수취한 대출금을 토해낼 경우 사건은 상당부분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이 그동안 대출금을 제때 갚아왔다는 점에서 불법대출금이 상환되면 단순한 금융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본지는 이와 비슷한 금융사건을 지난해 6월 10일 단독보도([단독]NH농협증권, 필리핀서 160억원 날린 ‘내막’) 한 바 있다.
지난 2008년경 필리핀 수빅만 자유무역항 내 콘도 및 호텔개발사업을 주도했던 농협증권 부동산금융 본부장 정모 씨 등이 ‘가장납입’ 수법을 통해 유령회사를 세워 수협, 기업은행 등을 끌어들여 250억원의 자금을 불법대출한 사건이다. 가장납입은 주식회사 설립이나 유상증자시 실제 대금을 납입하지도 않고 납입한 것처럼 꾸미는 행위를 이른다.
이후 채권은행단은 이같은 사실을 알게 돼 농협증권을 상대로 형사고소 및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지만, 농협증권은 채권단에 대출금 전액을 변제해 주면서 정씨 등은 형사처벌을 면했다. 농협증권과 채권단은 정씨의 행위에 사기·횡령 등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씨는 이후 분양피해자들로부터 배임혐의 등으로 고발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은행들 “KT ENS 인감은 진짜…KT가 책임져야”
KT “개인 차원의 일…금융사들 확인절차 소홀”
하지만 은행들이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사건 자체가 사기·횡령사건으로 불거질 수 있으며, 이 경우 상환책임을 둘러싼 치열한 법정공방이 예상된다.
KT 측은 대출서류 자체가 조작 된데다, 은행 대출담당 직원이 공모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책임을 은행 쪽에 돌리고 있다.
반면 금융사들은 KT 자회사 간부급 직원이 KT ENS 인감이 찍힌 매출채권을 협력사에 발행한 만큼 KT 측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입장이다. 이미 일부 금융사들은 KT ENS를 상대로 소송전에 들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대출 피해액은 하나은행 1624억원, 농협은행 189억원, 국민은행 188억원 등 시중은행이 2000억원을 웃돌고 있다. 저축은행은 BS저축은행이 234억원으로 가장 많고 OBS저축은행, 현대저축은행, 인천저축은행, 우리금융저축은행, 아산저축은행, 민국저축은행, 공평저축은행, 페퍼저축은행을 합치면 800억원 규모다.
금융당국은 계좌 추적 등을 통해 돌려막기에 연루된 금융사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은 다른 금융회사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는지에 대해 긴급점검에 나서는 한편 전체 금융권을 대상으로 매출채권담보대출 관련서류의 진위여부 확인을 지시한 상태다. 따라서 피해금액은 당초 알려진 3000억원을 훨씬 뛰어넘을 가능성도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조사가 본격화 된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금융사들과 KT 간 책임공방의 쟁점은 매출채권이 어느 정도까지 조작됐느냐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번 대출 사기에 사용된 인감은 대부분 등기소에서 발급된 진짜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KT 측은 인감 자체가 위조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은행 측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KT ENS 부장급 간부인 김씨가 몰래 인감을 가지고 나와 도장을 찍어준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단 인감 책임론에서는 은행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법인인감은 그 회사의 지문 같은 것이며, 은행들은 업체에서 인감증명을 떼 오면 고유번호와 직인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며 “은행으로서는 정상대출 절차를 밟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KT ENS
KT ENS는 대출의 근거가 된 세금계산서(매출채권)이 수기로 작성됐음에도 은행들이 확인 절차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법인사업자는 2011년부터 전자세금계산서 발행이 의무화돼 있는데 대출의 담보물로 제출된 세금계산서는 수기로 작성됐다는 것.
또 KT 측은 “대출 규모가 클 경우, 은행들이 대출신청 회사나 지급보증사의 이사회에서 이를 의결한 사실(회의록 등)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관례임에도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인감의 진위에 대해서도 “일부 금융사가 갖고 있는 KT ENS 명의의 채권양도승낙서를 보면 사명은 ‘케이티 이엔에스’라는 현재 사명이 기재되어 있지만, 날인된 사용인감은 사명변경 전의 ‘케이티 네트웍스’로 찍혀 있어 위조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KT 관계자는 CNB에 “회사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직원 개인이 일을 저지른 데다, 은행 쪽 확인 책임도 있는 만큼 배상이 어렵다”고 전했다. 신임 황창규 KT 회장도 관련 부서에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급보증 선 증권사들 ‘비상’
은행에 지급보증을 선 증권사들도 비상이 걸렸다. 한국투자증권·신한금융투자는 하나은행에 ‘KT협력사들이 세운 특수목적법인(SPC)이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이를 대신 갚겠다’는 지급보증을 섰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음주운전 차량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고 보상받지 못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보험사가 피해자에게 선보상조치를 취한 뒤, 가해차량에 구상권을 청구하듯이 이번 사건도 보증업체가 은행에 우선 변제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증권사들은 “대출의 담보인 매출채권이 허위가 아니라는 전제로 보증한 것인데, 매출채권이 가짜라면 담보도 가짜이므로 보증의무도 없다”며 맞서고 있다. 이들은 소송에 대비해 법률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경찰과 금융당국은 이번 사건이 KT ENS 직원 김씨와 납품업체의 공모만으로는 성사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대출과 연루된 금융사들 내부 직원이 관련됐을 가능성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금감원은 최수현 금감원장의 지시 아래 저축은행과 은행 검사 인력을 총동원해 금융사 내부 공모자를 찾고 있다.
사법당국은 KT ENS의 휴대폰 판매 관련 매출이 2011년과 2012년 각각 400억원에 불과했는데도, KT ENS 납품업체들에게 수천억원대의 대출이 이뤄진 점에 주목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이번 부정대출 사건이 저축은행 상시감시시스템에 적발돼 드러난 만큼 저축은행 쪽에 내부공모 무게를 두고 있다”며 “대출서류의 진위 여부를 떠나 대출심사 과정의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만큼 단순한 업무태만인지, 공모인지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전했다.
은행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오랫동안 부정대출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까지는 상당 시일이 걸릴 것”이라며 “일단 어디까지가 정상대출이고, 어디서부터가 불법대출이었는지부터 가려져야 하며, 대출금의 용처까지 파악된 후에야 단순금융사고인지, 사기사건인지 구분이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