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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교수의 공연예술 산책

연극배우 김미숙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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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락현기자 |  2014.04.14 18:14:32

“연극이 이제는 내 삶이고, 인생이 된 것 같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잘 표현해 내는 배우 김미숙. 그녀의 연기는 무대에서 진정한 삶을 이어가는 배우고, 한국적인 광대다. 


연극배우 김미숙.(44·연희단 거리패)

▲연극배우 김미숙. 그녀의 연기는 우리것과 현대의 경계를 넘는다.(사진/김건표 교수)

이윤택 연출로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른 로르카의 ‘ 피의 결혼’에서 등장인물 신랑의 어머니 역을 맡아 배우로써 호평을 받았다.
남도소리, 플라멩코, 굿, 설 장고 등 우리 것을 몸으로 뒤 흔들고, 그 감정의 소리를 자유자재로 내 뱉을 수 있는 유일한 배우가 김미숙이다.
주변에서는 이윤택 연출의 연극 무대에서 사용되는 우리것의 재료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말한다.
그 만큼 한국적인 배우다. 안숙선 명창도 그녀의 소리를 듣고, 소리꾼이 되면 세계적인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윤택 연출은 “연희단 거리패 배우들이 다 다르다. 김소희 배우는 유럽의 언어, 말을 일상적으로 잘 소화해 내는 배우라 할 수 있어요. 김미숙 이라는 배우는 한국배우죠. 한국의 전통적인 맥, 그 전통성을 이어가는 배우라 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한국적인 연기가 있다면 김미숙 이라는 배우가 한국적인 연기자로는 유일하죠”라고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섞인 어조로 내뱉는다.  


분장실은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찼다. 배우 김미숙은 배우로서 역할로 들어가기 위해 분장사의 빠른 손놀림에 맨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분장 도구와 재료들이 앞 선반에 빈틈없이 널려져 있었다. 분장사는 배우의 얼굴에 집중하고, 배우는 거울에 집중했다.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 수백 번 배우의 맨얼굴이 분장으로 달라져도 이 노련한 배우도 긴장 할 수 밖에 없는지 천천히 달라지고 있는 그녀의 맨 얼굴을 거울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서서 이야기를 하고 배우는 앉아서 대답을 이었다. 침묵속에 그녀가 앞에 놓인 작은 고구마 하나를 들었다. 먼저 물었다.
▲“관객들은 배우들이 분장을 받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배우가 서서히 등장인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 인가?”

그녀는 감은 눈으로 “분장은 분장이다. 분장은 배우가 인물이 되기 위해 계단을 한 발짝 올라가는 것이다. 역할 속으로”그녀의 민낮의 얼굴과 그녀가 역할로 분한 신랑 어머니의 모습이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분장을 하고 나면, 호흡의 깊이가 달라져요. 맨얼굴 김미숙에서 분장을 끝나면 역할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죠. 그 인물 속으로 들어가 있는 거며 가면을 쓰고 벗는 것과 같아요. 가면을 쓰면 익명성이죠. 그래서 달라져요. 무대에서 난 어떤 짓을 다 할 수 있여요. 가면을 썼기 때문에 울고, 소리치고, 소리하고, 다 할 수 있는 거에요”


▲“무대에서 대사만 하는 게 아니라, 소리도 하고 플라멩코도 추니 힘들었을 것 같다. 연습과정은 어땠나?”

의외의 대답을 한다. “ 오히려 공연을 하면서 힘이 들었어요. 보통공연은 2-3번 정도 하면 리듬도 찾게 되고, 관객도 읽히고 배우로써 주어진 인물을 찾아갈 수 있는데 이 공연은 안 되더군요. 늘 첫 공연을 하는 것 같아요” 

연극 무대에서 노련한 배우가 말 한 것 치고는 엄살로 들렸다.


“이 피의 결혼의 이야기의 이것을 풀어놓는 연극무대에는 형식이 많아요. 플라멩코와 안무도 많죠. 이 작품에서 플라멩코는 표현을 해야 할 큰 덩어리이죠. 이야기가 갖고 있는 내면이 있어요. 그 캐릭터들에서 느껴지는 내면을 약간 놓쳤어요. 작품에 등장하는 신랑의 어머니가 품고 있는 심연은 살 떨림이에요. 심연의 깊은 정서가 있죠. 이 여인은 남편과 아들의 죽음 때문에 밖을 20년 동안 안 나갔어요. 그런 여인의 깊은 심연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그것을 놓쳤었어요”

배우로써 자신을 들어내고 솔직하게 얘기를 꺼낸다는 게 힘든 일이다. 배우 김미숙은 솔직하다. 그 솔직함이 무대를 통해 그대로 들어나서 맑다.


두 사람의 대화가 무거워 지고 있었다. 물었다. ▲“심연의 무거움 보다는 오히려 여인의 삶을 초월한 것 같아 연기가 아주 경쾌했다. 김미숙 이라는 배우만 표현 할 수 있는 역할이다. 감정을 담지 않고, 풀어내는 브레히트적인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그녀가 웃었다.  “그건, 우리나라 식이여서 그렇다”


▲“어떠한 표현들이 우리나라 식인가?” 물 컵을 집어 들고는 마시려다가 멈추었다.  
“우리나라 민족성은 가슴에 담아두는 민족성을 갖고 있지 않다. 한과 맺힌 것을  풀어내는 민족성을 갖고 있다. 일본은 완전히 맺힘으로 끝난다. 감정을 무겁고 굵직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풀고 씻어내는 민족이라서 그런 것 같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그렇게 된다. ‘씻김’은 풀어내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보인다. 한 여인의 삶의 과정이 예민하고 다양한 형식을 찾다보니, 이 여인의 가슴에 묻어있는 심연을 약간 놓친 부분이 있다. 늘 그 마음을 찾는 과정이고, 그래서 늘 첫 공연 같다.”


그녀가 ‘연희단거리패’이윤택 연출가와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21년째다.

이윤택 연출과 무대에서 호흡과 박자를 맞추고 60여 편의 연극을 함께 했다. 삶을 돌아보니 연극배우로는 중견의 나이가 됐다.
연극을 붙잡고 버티니 무대에서 배우로써 쓰임새도 달라졌고, 배우로써 체질도 바뀌었다.
2006년에는 브레히트의 ‘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윤택 연출)로 제43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받으면서 연극계에 확실한 신고식을 치렀다.
“....벌써 중견이 됐네. 21년을 연극무대에서 버티니 무대에 섰을 때의 느낌이 달라져. 배우로써 중견을 넘어서려는 시작에서 무대가 편안해 진다고 할까. 느낌이 불안하지 않고, 관객과 마주 했을 때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게 변화된 거다”


배우에게 등장인물의 역할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 연기를 접하는 연기자도 노련한 배우도 ‘나’에서 다른 ‘너’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할 찾기의 힘든 과정은 없었나?”
20여분 흐르니 그녀도 대화에 적응을 했다. “글쎄...나는 별로로 없었던 것 같다. 선입견을 갖고 주어진 캐릭터를 들여다보지를 않는다. 연습이 진행이 되면서 ‘아! 이런 인물 이였구나.’ 하면서  첫 텍스를 읽었을 때의 첫 느낌을 유지하려고 한다. 나에게 이번 ‘피의 결혼’ 작품은 20년간 밖을 나가보지 않는 여자의 마음. 대체 이 여자는 어떤 여자 일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오랜 세월을 죽음을 가슴에 묻고 있는 여인의 삶. 처음에는 무겁고, 딱딱하게 표현을 했다. 하지만 이 윤택 선생님은 그렇게 표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좀 편안하게 관객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했다.
첫 연습에서는 조금 무겁게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감정을 풀어낼수록 좋았고, 연출도 그렇게 표현되길 원했다. 그래서 반응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른 이번  ‘피의결혼’은 이 윤택 연출이 원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작품 재구성을 했다. 극 흐름은 브레히트적인 서사적인 방식을 취한다. 무대에서 들어나는 극적흐름의 감정에 관객을 몰입시키질 않는다. 관객은 감정에 젖지 않는다. 이윤택 연출이 만들어 놓은 연극의 삶과 형식을 보면서 때로는 웃고, 흥겨워하면서 무대에서 일어난 인물들의 삶을 관객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나둔다. 재밌게 관극할 수 있는 대중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연출자로써 그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에 지론이다. 


그 안에 이윤택 연출의 특유의 우리재료들이 ‘섞임’으로 융합되면서 질펀하게 노는 ‘신명’과 ‘축제’의 무대로 만들어 놓는다.

▲“이번 작품도 브레히트의 서사적 표현방식이 많다”
“어디까지를 서사적으로 잡을까도 중요 했다. 연극 이라는 게 우리가 원한다고 관객이 보는 것도 아니고, 관객의 각자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그 등장인물의 삶의 인생사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 각자의 시선의 다르다. 그런 점에서 이 윤택 선생의 브레히트 적인 서사적 표현과 우리 전통 연희의 놀이 들이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선생님은 철저하게 그 방식으로 가기 위해 때로는 작품을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그 만의 연극적인 새로운 집을 짓기 때문에 이 윤택 선생님만이 할 수 있는 연극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무대에서 표현한 남도소리와 플라멩코 연습과정이 궁금해 졌다. 
▲“ 플라멩코와 우리 것의  만남을 표현하기 위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녀의 시선이 거울로 향하고 있었다. “2007년도에 피의결혼을 했다. 그때는 워크숍을 하면서 꾸준하게 이 작품을 준비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때는 플라멩코의 원형이 흐트러져 다소 무용처럼 표현된 점이 있었다.  이번 작품은 오랜 시간 준비해온 노력들이 다 흡수 되어 있다. 지금 공연에서는 플라멩코의 원형들이 그대로 살아있다. 각기 다른 두 나라의 음악이 함께 숨을 쉰 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고, 그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연습 과정은 힘들다. 이 윤택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다. 영혼이 하나가 되는 것을 원했다. 한쪽에서 ‘아하~’ 하면 그것을 받는 사람이 즉시 ‘어이~’ 할 수 있는 박자와 리듬이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서로 마음이 일치되지 못하면 할 수 없다. 자유로운 즉흥적 연주가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연습과 교감뿐이다” 


말을 빠르게 이어 졌다.  속도를 내서 물었다.
▲“남도소리를 등장인물의 감정에 입혔다. 대사를 감정에 입히는 것하고 남도 소리로 인물의 감정을 입히는 차이는 뭔가?”
그녀도 빠르게 말을 받았다. “어째든 말이라는 것은 생각과 느낌을 누구에게 전달하는 언어라고 본다면, 꼭 언어는 말 뿐 아니라 몸 짖. 소리가 다 포함돼. 밖으로 표현해 내는 방법의 다른 점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말을 하다가 기쁘면 노래를 할경우도 있다. 똑 같다”


이번‘ 피의결혼’에서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플라멩코 춤을 추면서 죽음을 초월한 한 여의의 삶을 경쾌하게 표현해 냈다. 남도소리의 그녀의 울림은 그녀가 말 한 대로 짓눌려 있지 않고, 담겨 있는 마음의 무게가 아니다. 밖으로 표출되는 ‘씻김’의 소리다. 맑게 들리면서도 아프다.


▲“남도 소리하고, 우리의 장단 공부는 언제부터 하니 그렇게 능숙해 졌나?”
이 말을 듣고는 그녀는 크게 웃었다. “안했어 공부를 안했다. 남도 소리 연습은 내가 풍물을 가르치고 극단에 들어와서는 내가 훈련을 담당한 것이 우리 소리, 풍물, 국악 이고, 이윤택 선생님하고 전통적인 작품을 할 때는 항상 조연출을 했다. 그러니까 늘 난 그 속에 있었던 거다. 그 속에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몸과 소리가 만들어 지더라. 연극적으로 표현할 정도는 늘 갖고 있다”


▲플라멩코와 우리 것에 같은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박자와 리듬이 같다. 플라멩코의 노래인 깐떼 혼도(cante jondo)의 소리의 꺾임은 우리 소리의 그대로라고 보면 된다” 즉석에서 그 소리를 불러준다. “우리 장례식장가면 할머니들이 아이고~~아이고~~ 하고 운다. 우시면서 누가 옆에 있고 찾아오면 ‘밥 먹었나’ 라고 일상의 말을 하면서 또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슬프게 운다. 이게 소리도 아닌 것이 말도 아닌 것이, 서로 박자가 맞게 된다. 이게 진짜 우리의 화술이 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깊은 한의 정서가 노래로 소리로 춤으로 깊게 묻어 있는 것 같다. 그 박자 속에 우리의 말이 자연스럽게 입혀지니까 융합이 되고 아름다워 진다”


▲“배우로써 그 과정을 찾아간다는 게 힘들지 않나?”
“재밌다. 무대 위에서 배우라는 것은 거리를 갖고 다양한 움직임 소리, 대사로 표현을 한다. 스스로 발견을 할 때가 있다. 말에서 소리로 넘어갈 때 소리에서 말로 넘어갈 때 숨을 섞어서 할 때 참 재미있다. 노래를 배울 때와 비슷하다”


이 말을 듣고는 공연에 배우들의 융합된 앙상블이 떠올랐다.
1막 첫 장 에서는 앞으로 예견될 죽음의 극적 대립들이 플라멩코의 리듬을 따라 만들어 졌다. 무대에서 퍼지는 그 리듬위로 움직이는 배우들은 무대 위를 걷고, 뛰면서도 조화로운 인물의 정서를 만들어 냈다. 


레오나드로역 (윤정섭), 신랑역(이승헌), 신부역(김하영) 배우들을 인물의 정서들을 서로의 경계를 넘지 않으면서 앙상블을 만들었다. 그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아내(이주영), 장모. 거지여자( 차희), 역할을 맡은 배우들도 작품의 주제와 관통 될 수 있도록,  등장인물의 표현적 심리묘사를 잘 이끌어 냈다.


배우에 대해서 궁금해 졌다. ▲“배우가 무대에서 드러내 보이려고 하면 추해진다. 서로 지켜야 할 감정의 선들이 있다. 이것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 서로 다른 심리들을 절제하니 융합이 잘 된 것 같다. 연습과정에서 앙상블은 어땠나?”

“우리 극단의 배우들의 앙상블은 너무 좋다. 그게 공동체 생활의 큰 장점이다. 먹고 자는 것을 밀양 연극 촌에서 함께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너무 잘 알고 배려와 이해가 있다. 그건 것들이 작품에 그대로 흡수가 된다”


배우 김미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공무원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공무원이 되기 힘들었던 당시에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공무원이 됐으니 대학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먹고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평범한 길을 가고 싶었다. 공무원 생활이 익숙해 질 무렵,  몇 년간 손을 놓고 있던 대학 공부가 다시하고 싶어졌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진학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학교는 ‘ 방송대학교’가 유일했다. 국문학과를 진학했다.


91년도에 방송대 국문학과를 입학 하면서 그녀 특유의 억척스러움이 발동되었다. 또 다른 그녀의 삶을 그려보고 싶었다.
한국방송대학교 ‘극예술 연구회’ 14기(91)로 대학 연극 동아리에 노크 했다. 그렇게 연극과 첫 인연을 맺었다. 국문학 공부를 하면서 연극하는 게 좋았다.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문학적으로 연극을 공부해야 할 입장이였지만, 왠지 연극이라는 세계가 신선하다고 느꼈다.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것들을 연극으로 해 본다는 게 그냥 끌렸다”고 말한다.  


몇 년간을 대학에서 죽도록 연극만하고 살았다. 연극이 좋아지면서 공무원 생활도 과감하게 접었다. 본격적으로 연극만 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들어가기 힘든 공무원 자리를 버렸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남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위안은 연극으로 했다.
연극을 할수록 직업으로 해도 될 것 같았다. 프로들이 노는 연극판 밖에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마음이 맞는 극예술 연구회 동료들과 마음을 모았다.       
연극문화의 중심인 대학로 연극판에서 그녀의 첫 데뷔작은 아동극 ‘둥개둥개 이야기 둥개 (1993·조승암 연출·극단 님비곰비) ’다.
이 작품을 하면서 처음으로 우리 것과 만났다. 우리의 전통놀이, 사물, 이야기들이 녹아있는 ‘ 둥개둥개 이야기 둥개’로 데뷔를 했다. 그녀가 20년이 넘은 지난 일을 끄집어낸다.


“당시에 아동극을 우리 것의 재료들과 융합해서 하는 극단들도 없었다. 동료들과 죽도록 연습만 했다. 돈이 없어 대학로 한 복판이 연습실이 됐고, 대학 강의실은 유일하게 추위를 피하면서 연습할 수 있는 장소였다. 연극을 제대로 모르던 나이였고, 열정만 있던 시절 이였으니까 그냥 죽도록 연습만 한거다. 이때 처음 사물, 장고를 익히면서 우리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여지게 된 것 같다” 


이 첫 작품으로 ‘제2회 서울어린이 연극제’에서 우수 작품상을 받고, 아동극으로 처음으로 일본 오키나와 아동, 청소년 연극제에 연극 ‘ 북어대가리’ 와 두 작품이 공식 초청 되면서 우리나라 아동극역사에 해외 공식 초청된 작품으로 의미 있게 기록 됐다.
   
뜻이 맡는 동료들과 좋은 아동극을 만들고 여러 작품을 하니, 연극이 더 좋아졌다. 연극을 제대로 하고 싶어졌다. 우리 극 연구소 단원 4기로 (1997) 출발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조금 모아둔 돈도 연극을 하면서 바닥이 났다.
그래도 연극이 좋았다.


물었다. ▲“우리 극 연구소를 왜 선택 했나?”
그녀가 잠시 말을 놓았다.
“ 단편적으로만 기억이 난다. 이왕 연극을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마음이였다. 독하게 마음을 먹은 거다. 가장 지독하게 훈련을 시키는 우리 극 연구소를 찾았다”며 웃는다. 이어 그녀는 “우리 극 연구소 생활은 여기는 뭔가 연극이라 것만을 위해 달리는 사람들이 좋았다. 그게 나의 마음을 지금까지 마음을 붙잡은 것 같다. 3년 지나니까 흰 머리 날 때까지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이 되어 나중에 힘만 있어도 연극무대에 선 다는 설렘을 갖게 되니 행복했다”


‘우리 극 연구소(1994)’는 우리 것의 다양한 재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실험적인 연극과 배우들의 연기 매소드도 그 연극적 문법에 맞게 제대로 된 훈련체계가 필요하다는 인식과 판단에서 '해외극의 우리극의 수용', '전통의 현대화'를 내세우고, 이 윤택 연출을 비롯해 뜻이 맞는 연출가( 김광림, 이 병훈, 윤광진) 들이 모였다.

당시 ‘우리 극 연구소’1기들로 구성되어 공연한 ‘ 허재비 놀이’는 우리 극 연구소의 출발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된다. 
서울중심의 대학로 연극문화인 제도권 연극에서 벗어나 있는 연극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시인이자 기자 출신인 이윤택 연출가가 36세에 기자 생활을 과감하게 집어던졌다. 1986년 7월19일에 일이다. 곧장 ‘연희단 거리패’를 창단해 부산 광복동에 허름한 가마 골 소극장 문패를 달고 문을 열었다.


이후 그는, 전투적이고 게릴라적인 연극을 우리 것인 재료들을 연극에 과감하게 섞음 으로써 (굿, 사물놀이, 전통연희, 소리, 전통탈춤과 놀이. 국악,)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전통재료들이 그와 연극으로 만나지면서 파격적인 연극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국내 현대연극에 잇단 문제작(푸가. 히바쿠샤, 산 씻김, 청부, 길 떠나는 가족, 시민K, 오구죽음의 형식, 바보각시, 문제적 인간 연산, 느낌, 극락 같은, 원전유서, 혜경궁 홍씨)등 수 십 여 편의 문제작들을 이 시대에 선보이면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가장 주목 받는 연출가가 됐다.       

▲연출가 이윤택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사진/김건표 교수)

물었다. ▲“ 배우에게 있어서 무대에서 표현되어지는 놀이성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윤택 연출이 추구하는 우리 것을 재료로 한 놀이성들은  무대에서 어떻게 만나지고 있나?”

그녀는 분장실 앞에 놓은 고구마 한 개를 집어 들면서 말을 이어갔다.
“놀이성이 잘 만나지는 게 코미디다. 전에 공연을 했던 ‘탈선 춘향전’ 이나 우리 것을 할 때 가장 놀이성의 잘 결합이 된다. 이번 작품에서는 놀이성과 비극이 만나질수 있냐가 실험적인 접근 이였다. 놀이성 이라는 것, 내가 표현하고 있는 남도소리가 놀이성이다. 우리 민족은 가. 무. 악을 즐기는 민족 이였다. 우리극단은 우리의 놀이성을 빼면 없다. 이윤택 선생님의 작품에 있어서의 이 놀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을 듣고 배가 고파졌다. 같은 크기의 고구마를 집어 들었다.
▲“그러한 우리것의 재료들을 섞이고, 다양한 연극적 놀이로 풀어내는 것이 연출이 추구 하려는 연극무대에서의 ‘신명’과 ‘축제’의 만남 아닌가?”

대답이 빠르게 들렸다. “그렇지. 선생님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축제라고 생각한다. 연극은 연극이어야 하고, 그것이 관객들한테 재밌게 전달되어야 한다. 무대에서의 우리 것을 통한 신명, 그 신명을 통해 축제로 이어지게 하자는 게 이윤택 선생님이 연극을 하는 이유가 된다” 이 말을 듣고는 ‘ 원전유서’를 쓴 김 지훈 작가가 새로 발간된 희곡 책을 들고 들어와서는 배우에게 전달을 하고 나간다.
     

그녀와 20여년을 함께해온 이윤택 연출가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20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한 다는 게 힘이 들지 않나?”
이 말에 그녀는 경쾌하게 높은 소리 음으로 말한다. “당연히 연극을 한다는 게 힘든 건데 힘들지 않은 날이 없다. 공동체라는 것이 잠을 자도 혼자 조용히 자는 게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는 공동으로 생활을 하면서 연극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현실에서 보면 힘들다. 하지만, 목표가 연극을 만드는 거다. 서로가 뜻과 마음을 함께 하는 연극, 그리고 그러한 연극이 이 윤택 선생님이 추구하는 연극방식과 연결되어 있고, ‘연희단거리패’의 모든 식구들이 힘은 들지만 연극으로 말해주고, 같이 만든 연극이 매번 성공적이다. 그게 위안이 된다. 연극을 하면서의 ‘힘 듬’은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껴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공연시작 1시간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 중견이 됐다. 배우로써의 책임감도 있을 텐데. 처음 연극을 접했을 때와 달라진 점은 있나?”
그녀는 지난 세월이 스쳐 가는지 잠시 머뭇거린다. “느낌이 불안하지 않고, 관객과 마주 했을 때 마음이 편해진다”


▲“배우로써 익숙해져서 그런가? 배우체질과 세포가 달라 진 건가?”
그녀가 웃는다. “익숙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헤헤헤. 나도 중견이 됐다. 마음이 무겁다. 초보자때는 ‘내가 잘해야지 틀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넘으면서 전체적인 공간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물었다. ▲“공간이 뭔가?”

그녀도 딱딱하게 대답해 온다. “공간은 말 그대로 공간이다. 연기자가 연기를 할 때 나와의 거리가 있고, 관객과의 거리가 있다. 내가 연기를 하는 나의 거리, 여러 가지 소품의 거리들도 있다. 밖과 세상과의 거리. 우주와 나의 거리도 이고, 시각이 넓어진다. 초보자는 ‘나’와 ‘나’. 나와 관객의 거리만 생각된다.  경험이 많아지고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으니까 이제 조금은 보이더라. 그 거리가 나와나 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나니라 더 깊은 거리에서 출발한다. 전체를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배우의 존재는 어떤 것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다. 어려서는 이런 불안함을 느끼질 못했다. 공연을 하고 시작 할 때면 두려운 불안감이 밀려 왔다. 15년이 지나면서는 더 불안해졌다. 이 과정에서 연극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극이 내 삶과 만나지게 되더라. 그러니까 그 전에는 내 삶과 연극이 100% 만나지지 않았는데 그 것이 하나가 되면서 불안감이 점점 없어지더라. 그런데 아무리 노련한 배우에게도 공연을 임 할 때면 늘 불안한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불안함도 생활이 된 것 같다. 공연 시간 전에도 다른 것도 한다. 이제는 극장 주변에만 있게 된다.  다른 짖을 전혀 안한다. 연극이 이제는 내 삶이고, 인생이 된 것 같다.  그러니까 내 인생을 마구잡이로 할 수 없게 된다. 연극이 내 인생이니까. 그 삶을 어떻게 소홀하게 대 할 수 있나? 없다”
 
 

이윤택 연출가의 얘기를 꺼냈다. ▲“연출가가 추구하는 것이 연극의 이상주의 공동체 정신이다. 이윤과는 상관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연희단 거리패’는 좋은 연극을 만들자는 생산적인 연극공장이다. 그 중심에 이상주의 공동체 연극생산 기업에 CEO가 이윤택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을 한다. “우리 극단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과는 다르다. 우리가 스스로 돈을 들려서 악착같이 연극을 만드는 거다. 문화의 소비가 달라지고 있다. 외국 관광객은 명동거리에 넘쳐 난다. 그들을 흡수 할 수 있는 것은 재밌게 만들어진 우리 것의 연극이다. 국가나 지자체 에서 관심을 갖고 키워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우리가 한다. 돈 안 되는 일은 우리 밀양 연극 촌 식구들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필요하고 누군가는 반듯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이윤택 선생님 같은 분이 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 연극을 만들어야 살고 버티기 때문에 한다. 이왕 연극을 할 봐 에는 좋은 연극 만들고 싶을 뿐이다”
        

작년 12월에 국립극단에서 올린 ‘ 혜경궁홍씨’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작 혜경궁홍씨와 피의 결혼은 고전 여인열전 ‘한’의 정서 시리즈다. 어떤 것이 다른가?” 

“혜경궁 홍씨는 궁중이라는 권력의 행보다. 귀족이다. 귀족의 맺힌 한들은 눌린 감정들이다. 그러나 피의결혼은 서민이다. 그 죽음으로 인한 한의 정서는 맺혀 있는 게 아니라 밖으로 풀어내는 거다. 그게 서민의 정서고 우리 민족의 정서다”


▲“배우로써 좋은 재료들을 갖고 있다. 그것이 무대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표현된다는 것은 잘 훈련된 배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연습하나?”

그녀가 나를 쳐다보면서 말한다. 거울로 향한 시선에서 나한테로 옮겨졌다.
“연습이고 끝없는 연습이다. 난 그런 것을 타고난 것이 없다. 내가 단지 타고 난 것은 집중력이다. 

그녀는 국내 배우 중 우리 것을 가장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배우다. 굿도 소리도 무당 이상의 표현 능력을 갖고 있다.


▲“배우 김미숙은 무당보다 굿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났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진짜, 진짜 굿을 한다는 것은 배우로써의 무당의 개념이다. 배우의 개념은 무당이다. 당연하다. 연극의 기원이 ‘제천’ 이다. 연극의 출발이다. 연기의 주체. 배우도 ‘제의’에서 시작 된 것이다. 배우는 제의를 집행하는 사람이고 무당과도 상통한다. 연습을 꾸준하게 하고, 배우로써 그 굿을 자연스럽게 체득이 된 것이다” 


무대에서 가볍게 뛰고, 펄펄 나는 배우가 존경하는 배우가 누굴까 궁금해 졌다.
▲“누구를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나?, 탤런트? 아니면 연극배우?”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배우라 그 이름을 외치는 음절이 떨렸다. 의외의 대답이 튀어 나왔다. 난, 노배우를 상상하고 있었다.
“탤런트 손현주다”


▲“왜?”
“연기가 다른 사람이다.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앞으로 연기를 하면서 누구에게 보이려는 배우가 있고, 어떤 배우는 내면의 깊은 곳을 보이려는 배우가 있다.  배우를 봤을 때‘아~ 저 사람 슬프게 연기’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내는 배우가 아니라 갑자기 “어...어...어.... 내 가슴이 왜 이러지 아프지.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고, 그 슬픔이 더 넓게 상상을 만들어 낸다.. 깊은 연기는 소리로 치자면 구강, 이런데서 나오는 게 아니고, 등 뒤쪽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소리와 감정이 몸의 깊은 뒤에 있다는 것은 배우의 깊이다. 그것을 소화해 내는 배우가 손현주 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13일부터 콜롬비아로 날아간다. 중남미 최대 규모의 축제인 ‘이베로 아메리카노’ 국제 연극제에 초청을 받았다. 2년 전 에는 ‘햄릿’을 선보여 폭팔적인 반응을 받았다.    
“여러 해외공연을 다녔다. 이번 피의결혼 공연의 의미는 좀 다를 것 같다.”
그녀 마음은 이미 콜롬비아로 향했다.
“2년 전에 햄릿 공연은 정말 폭팔적이였다. 텍스트는 마지막 장면은 햄릿이 죽으면 끝이 나는 구조다. 우리 연극은 죽은 자들을 다 깨워서 진도 ‘씻김’으로 간다. 진정한 체험이다. 암전이 된 순다. 그 순간, 3천여 명의 관객들이 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다”


말을 이었다. ▲“그것이 이 윤택 연출의 문화상호주위적인 우리 것의 힘인가?”

“그렇다. 동양이라 게 서양한테는 낯설다. 이 낯선 땅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교류고 교감이다. 연극을 통해 우리 것과 서양의 이야기 문화가 절묘하게 융합되니 환호하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언어 연극을 좋아 하는 관객들도 있지만, 세계에서 통용 될 수 있는 것, 그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연극이 무엇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극단은 그것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중견을 넘어 20년 이상을 더 무대 서야 하는데 TV 드라마와 영화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주어지면 모든 역할을 다 소화 할 수 있나?”
“당연 한 거 아닌가? 김미숙을 쓰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줄 수 있다” 


▲“피의 결혼을 같이 하면서 좋은 배우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린다. “다들 좋은 배우고, 에너지가 넘쳐 난다. 개인적으로 레오나르도 역을 맡은 윤 정섭이가 기대 되는 배우고 가능성이 아무 많은 친구다”


▲“왜?”
“그 친구는 무대에서 들 끊는다. 배우는 들 끊게 있어야 한다”

공연 시작을 20여분 남겨두고 있었다. 그녀는 의상을 갈아입어야 한다면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간다.

▲김건표 교수.


● 김건표 교수(대경대학 연극영화방송학부)는 연극·뮤지컬·공연문화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아 공연분석을 통한 리뷰를 써오고 있으며, 인터뷰 전문 칼럼리스트다.  방송, 신문언론을 통해 600여명이 넘는 스타, 전문가, 공연예술가들의 인터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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