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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물대포 의식불명 백남기의 딸 도라지씨 “검찰 수사의지 없다”

청와대 앞 1인 시위 나선 그녀 “왜 아무도 사과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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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강소영기자 |  2016.05.03 09:23:47

▲지난해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여했다가 물대포를 맞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 씨가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CNB 취재진이 지난 1일 현장을 찾아 백도라지 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넘어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사진=강소영 기자)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여했다가 물대포를 직격으로 맞아 쓰러진 백남기(70) 농민이 의식불명 상태가 된 지 170일째인 지난 1일. 청와대 앞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진행 중인 그의 딸 백도라지(34)씨를 CNB가 만났다. 그녀는 왜 1인시위에 나선 걸까. (CNB=강소영 기자)

딸 백도라지 씨, 주말마다 청와대 1인시위
중국 관광객들 “북한 아닌 남한 일 맞냐?”
담당 검사만 세 번 바뀌어…수사의지 의문

박근혜 대통령이 이란을 방문한 이날, 청와대 앞은 중국 관광객들의 들뜬 목소리로 가득했다. 오월 초입의 따가운 햇살 아래 백씨는 ‘수사하라! 처벌하라! 사과하라!’ 문구가 쓰인 팻말과 함께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또 다른 팻말에는 “2015년 11월 14일, 경찰의 살인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이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처벌받지 않았습니다”라고 씌어있었다.

중국인 관광객들과 청와대 경호처 직원들 외에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청와대 입구에서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의식이 없다. 기관지를 뚫고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고, 혈압 올리는 약과 심박수 높이는 약, 뇌하수체가 눌려 이를 확장하는 호르몬을 맞는다. 이 외에도 스테로이드 항생제 등을 맞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 관광객들 중에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물어보는 이도 있다”면서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그가 주말마다 청와대 앞으로 나와 홀로 1인 시위를 하는 이유는 ‘물대포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백 농민은 2015년 11월 14일 오후 6시 56분 1차 민중총궐기가 열리던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서 박근혜 정부의 쌀값 공약이 파기된 것과 관련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물대포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진 그는 무려 4시간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다. 

▲백남기 농민이 1차 민주총궐기 당시 물대포를 맞는 모습이다. 경찰은 백 농민이 쓰러진 후에도 계속 물대포를 쏘았다. (사진=유튜브 캡처)

백 씨는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동안 경찰 측 누구도 사과를 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5월 14일이면 딱 사고난 지 6개월째가 되는데도 경찰 측은 정보관을 보내 상태를 묻고 누가 왔었는지 같은 정보를 파악했을 뿐이다. 검찰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기소 결정을 내리는 데에만 벌써 세 번이나 담당 검사를 바꾸었다. 아직 기소 여부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백씨와의 상황과는 반대로 경찰청은 1차 민중총궐기 후 지난 12월 22일 치안정감 6명과 치안감 24명에 대한 승진 및 전보 인사를 단행했다. 이 중에는 물대포 진압과 관련된 이들도 있었다. 

검찰은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1000여 명이 넘는 집회 참가자들을 소환 조사했고, 이 중 700여 명 가량에 벌금 등 사법처리를 했다. 

이와 관련 백씨는 “우리도 물대포를 금지하는 헌법 소원을 냈고 얼마 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검찰은 물대포 사건에 대해 세 번의 검사 배정을 했고, 수사 진척 상황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다. 물대포 진압 관련자들 고발장을 냈는데도 경찰과 검찰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검찰이 수사 의지가 없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과연 무엇이 70세 고령의 농민을 영하의 날씨에 시위 현장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선 당시 ‘쌀값(80kg)인상 17만원을 21만원대로’라는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이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백씨는 “밥상용 쌀은 생산량의 10분의 1을 정부가 수매한다. 남는 쌀은 농민이 팔아야 한다. 그런데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로 쌀이 시장개방 대상에 포함된 지 20여 년 만에 17만원을 유지하던 쌀값이 13만원 대로 뚝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한편, 백씨와의 인터뷰 중 청와대 경호처 관계자는 CNB 취재진을 주시하며 지속적으로 소속과 기자 이름을 물었다. 

이 관계자는 “1인 시위이니 옆에 누군가 있을 수 없다. 인터뷰를 하려면 청와대 경호처에 연락을 해야 한다”며 인터뷰를 빨리 끝낼 것을 종용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CNB 취재진은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건의 두 번째 담당검사에게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만 관련자로부터 “부장검사로 담당이 바뀌었다. 수사 중이기에 다른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응답을 받을 수 있었다.

(CNB=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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