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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발언권 가진 이들, 한강의 '언어 겸손' 좀 배우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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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연수기자 |  2016.05.25 11:29:54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사진=연합뉴스)


비스듬히 보이는 한반도 지도 위에 지역별로 동심원 형태의 그래프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펼쳐진다. 꽃이 지었다 피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자라나던 그래프는 이윽고 입체로 튀어나와 분수 모양으로 솟아오르다 어느덧 불꽃놀이의 폭죽처럼 공중에서 팡팡 터진다. ‘아... 이런 것을 뭐라고 했지? 이런 걸 가리키는 용어가 있었는데... 스... 스... 뭐였더라?’


정확한 자료를 찾기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잠자리...’ 그런 것은 없었다. 꿈이란 걸 깨닫는 순간, 내가 꿈속에서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내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세 문장 가량으로 설명해야 했던 현상을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는 단어 하나. 더불어 그 단어를 까먹은 나를 자책했던 속상한 감정이 잠이 깬 이후에도 꽤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그 감정은 곧바로 단어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최근 눈길을 끌고 많은 생각을 일으키는 사회적 이슈에는 많은 단어들이 뒤따른다. 아니, 정확히는 많은 단어에 대한 정의들이 뒤따른다. ‘여혐’ ‘남혐’ ‘OO충’ ‘OO녀’ ‘OO남’같은 신조어에서부터 ‘관행’ ‘팝아트’ ‘개념’에 이르는 특정 분야의 세밀한 정의가 요구되는 단어까지 아무리 언어가 변화하고 있다 하더라도 후대에서 이해 못 할지 모를 단어들, 명사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 누구나 온라인 세상에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요즘 ‘정의 내리기’가 일반화돼 있다. 특정 집단의 단점을 한 번에 꼬집어 낼 수 있는 한 단어를 제시하면 위트이자 촌철살인의 감각을 가졌다고 인정받기도 한다. 나아가 논리적으로 보이는 말들로 여성과 남성을 서로 정의하거나, 말로 한 가닥 하시는 분께서 현대미술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도 한다.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현대미술이라면 왜 미술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편리해서일 것이다. 같은 세대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단어들이, 시간과 공을 들일 필요 없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어 매우 경제적이다. 하지만 그 특정한 영역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독의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오독과 거기서 비롯된 오해는, 다양한 개인 혹은 사회 배경에 따라 근간에 뿌리박힌 관념과 편견을 작동시키기 마련이다.


생산적인 오독 있는 반면 

제자리 맴맴식 한국의 보수-진보 말싸움도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도시괴담’전에선 여러 나라 작가들이 모여 언어적 제약을 오히려 창작의 요소로 활용한다. 그들은 서로 오해하거나 오독을 장려한다. 그 역설적 행위의 결과로, 오히려 다른 문화‧사회적 배경에서도 믿음과 두려움 같은 감정이나 괴담-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공통적인 원형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미술적 사고과정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말싸움을 하는 이들은 이미 감정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진보 성향의 정청래 의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보수 성향 사람들이 비판한 내용을 보고 웃음이 난 적이 있었다. 그 주체만 다르다 뿐이지 진보 성향 사람들이 보수당 의원을 비판하는 내용과 형식이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다른 배경에서 비롯된 오독은 창조적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오독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내리는 어설픈 정의는 반목을 생산한다. 이 사회에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언어를 부정하거나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다만 발언에 있어 최소한 겸손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타고 귀국한 작가 한강은 기자 회견에서 “한 문장을 번역하는 데 20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다”며, “언어의 섬세함에 감탄했다”고 밝혔다. 그녀의 말에서 평생 언어와 씨름했을 작가임에도 교만하지 않게 언어를 대하는 겸손함이 엿보인다.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자들이 위트와 지식을 자랑하기 전에 갖춰야 할 것은 이런 겸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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