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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텔링] 농민 백남기는 뭘 남기고 떠났나

317일 사투, 그는 그날 왜 맨 앞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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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16.09.27 12:13:50

▲백남기씨가 경찰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은 지 11일째 되던 날인 지난해 11월 25일 서울대병원 앞 천막농성장 앞에 내걸린 백씨의 사진과 캐리커처. (사진=도기천 기자)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317일 만에 숨진 백남기 농민(70)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농민단체는 물론 정치권과 종교계, 노동계 등에서 국가폭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SNS에는 수많은 추모글이 올라오고, 공유되고 있다. 특검도입을 촉구하는 서명운동도 한창이다. 많은 이들이 이토록 그를 기리는 이유는 뭘까. 그는 어떤 족적을 남기고 떠난 걸까. (CNB=도기천 기자) 

‘더불어 사는 삶’ 말해주고 떠나
“우리가 죄인” 끝없는 추모행렬  
철면피 경찰 맞서 SNS 공감 물결
 
전남 보성군에서 농사일을 하던 백씨는 지난해 11월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백씨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3백여일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국농민회총연맹, 카톨릭농민회 등 농민단체들은 백남기 대책위를 꾸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사과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백씨 가족은 당시 경찰총수인 강신명 전 경찰청장 등 7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지만 검찰은 수사를 미뤘다. 강 전 경찰청장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백남기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야당 의원들이 입수한 폐쇄회로(CC)TV 영상, 일부 언론이 근접 촬영한 당시 현장영상,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경찰 살수차는 백씨를 겨냥한 ‘직사살수’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백씨가 쓰러진 뒤에도 물대포는 몇 초간 백씨에게 쏟아졌다. 이때 수압은 50층 건물 꼭대기까지 물을 쏘아올릴 수 있는 압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망원인이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로 밝혀졌음에도 경찰은 부검을 하겠다며 생떼를 쓰고 있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투쟁대회’ 당시 경찰이 경찰버스를 발로 차고 있는 시위자를 향해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로 조준 사격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백남기씨는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317일만에 숨졌다. (사진=도기천 기자)


매뉴얼 없는 진압…죽음 예견된 일

백씨의 죽음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대회 당시 경찰의 태도는 과거 집회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경찰은 집회 대응을 위해 240여개 부대, 2만2천여명의 경찰력을 배치하고 경찰버스 700여대와 차벽트럭 20대, 살수차 등의 장비를 동원해 광화문 광장 일대를 원천 봉쇄했다.

서울역, 시청, 대학로 등에서 단체별 사전대회를 개최한 참가들이 수천명 단위로 광화문 광장으로 행진해 오자 경찰은 저지선을 치고 오후 4시경부터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발사했다. 

당시 집회 규모와 비슷했던 2008년 광우병쇠고기 수입반대 시위, 2014년 세월호 집회 때는 서울광장 내 집회가 허가 됐었다. 또 물대포는 야간시위 금지 명목으로 해가 진 뒤에만 간간히 발사돼 왔지만 이날은 대낮(오후 4시경)부터 물대포가 분사됐다. 

물대포에 섞인 최루액 농도도 과거보다 훨씬 짙었다. 통상 약간의 캡사이신 성분이 물에 함유됐지만 당시에는 다량의 최루액이 섞였다. 집회참가자들은 기침·피부 발작 등 고통을 겪었다. 

특히 경찰은 물대포를 곡사가 아니라 직사로 살포했다. 대통령령인 ‘위해성 경찰장비의 사용기준 등에 관한 규정’은 가스차나 살수차 등으로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우, 15도 이상의 발사각을 유지해야 하고, 물대포를 발사할 때도 사람을 향해 직접 쏘면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매뉴얼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이런 경찰의 과잉대응은 민중대회 전 정부가 천명한 엄정 대응 원칙에 따른 것이다. 당시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법이 정한 절차를 어기거나 다른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신속하고 단호하게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교육·법무·행자·농림·고용부 등 5개 부처는 집회참여를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공동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야권에서는 ‘국민을 상대로 한 협박’이라며 반발했지만, 경찰은 정부방침을 충실히 따랐다.  

경찰이 고령의 농민들을 강경진압 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건을 ‘정보력 부족’ 측면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경찰은 지난 2005년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시위 중 경찰에 의해 사망하자 다른 집회와 달리 농민 시위는 강경진압을 자제해 왔다. 고령자가 많아서 불상사가 생길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통상 대규모 집회 때는 경찰 정보요원이 시위대 속에 침투해 집회 성격 등을 상부에 보고해 경찰 주력부대가 집회의 성격에 맞게 분리 대응한다. 당연히 고령자들이 많은 농민단체 집회는 방어적으로 대응해 왔다”고 밝혔다.

▲백남기 농민(앞에서 두 번째 징을 들고 있는 사람)의 2005년경 모습. 그는 평생 농부였다. (사진=카톨릭농민회)


백씨는 왜 맨 앞에 섰나

그날 백씨는 전남 보성농민회 소속으로 상경해 오후 1시경 숭례문 앞에서 열린 전국농민회총연맹 주관의 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오후 4시부터 열리는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경찰이 광화문 광장 일대에 차벽을 설치해 행진을 가로 막자 백씨를 비롯한 농민들 일부가 경찰버스를 밧줄로 묶은 뒤 당겨서 넘어뜨리려 했다. 경찰은 백씨 일행을 향해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발사했으며 백씨 등은 물대포에 직격으로 맞아 쓰러졌다. 

경찰은 백씨가 쓰러지고 나서도 수 초 간 백씨를 향해 계속 물대포를 발사했으며, 이 때문에 근처에 있던 다른 시위대가 몸으로 물을 막으며 백씨를 끌어내 구급차에 태웠다.

백씨가 차벽 맨 앞에서 섰던 이유는 성격이 불같거나 앞장서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백씨의 지인들은 “그는 30년 가까이 한 자리에서 농사를 지은 순수한 농사꾼이자 농민운동에 헌신해 온 사람”이라고 전한다. 

그는 ‘땅’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주변의 신망도 두터웠다. 독실한 카톨릭 신앙인이기도 했다. 땀 흘리며 농사짓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밤낮없이 뛰어 다녔다. 

1989~1991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8대 회장, 1992년 가톨릭농민회 전국부회장, 우리밀살리기 전국회장, 보성군농민회 감사 등을 맡을 정도로 농민운동에 열심이었다. 

특히 우리밀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다. 그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여 동안 전국 방방곡곡 돌며 밀 종자를 모았다. 1992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을 주도했고, 2년 뒤 공동의장을 맡았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2015년엔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을 지내며 후배 농부들을 뒤에서 지원해왔다. 

그날도 평소처럼 맨 앞줄에 서서 쌀 수입 중단 및 정부 수매 정책에 항의하다 변을 당한 것이다.  

▲백남기씨가 숨진 25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시민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이날 경찰은 병원 출입을 봉쇄했지만 시민들은 SNS를 통해 백씨 빈소에 가는 방법을 공유하며 모였다. (사진=연합뉴스)


SNS가 유일한 언론 

백씨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300여일 간 그의 쾌유를 기원하는 촛불은 단 하루도 꺼지지 않았다. 그의 회복과 경찰의 강경진압을 규탄하는 천막농성장이 병원 앞 인도변에 마련돼 전남 보성군 옹치면에서 상경한 주민들과 시민들이 매일밤 불을 밝혔다. 

20대 국회가 개원한 뒤 우여곡절 끝에 ‘백남기 청문회’가 열렸지만 경찰은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경찰 총수였던 강신명 전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지휘부는 사과를 거부하고 ‘적법한 공무집행’이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검찰은 사건발생 7개월이 지나서야 당시 현장책임자를 불러 조사했지만, 경찰 지휘부는 소환하지 않았다. MBC·KBS 등 공중파 TV는 이를 단신기사로 처리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SNS를 통해 그간의 과정을 빠른 속도로 전파하고 있다. 백씨가 사망한 직후 경찰이 병원을 봉쇄하자 ‘빈소로 들어가는 방법’을 소상히 알렸다. 시민들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현재 빈소 현황’을 올리며 경찰이 어디 가냐고 물으면 “이 중 한 사람(고인) 이름을 대라”고 알려줬다.  

의료계의 부검 반대 의견서, 법조계의 공권력 규탄 성명, 백씨의 최초진료 기록 등도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다. 진상규명 특검을 요구하는 온라인 서명도 불붙고 있다. 문재인, 심상정, 이재명, 박원순, 노회찬, 표창원, 정청래 등 스타급 정치인들의 추모트윗은 수백~수천회 리트윗 되고 있다.     

그를 기리는 발길은 농민운동, 민주화운동을 함께해온 시민사회 진영부터 일반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빈소에는 며칠째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분향소를 찾은 한 시민(45)은 “(그분의 모습에서) 시골 친정아버지가 생각나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늦은밤 병원을 지키고 있는 한 청년(20)은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몰라 알바를 쉬고 왔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에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의 삶이 말해 주기 때문이다.    

잠든 이웃들을 화마로부터 구하고 정작 자신은 불길과 연기를 피하지 못해 숨진 ‘초인종 의인’ 안치범씨, 지하철 스크린공사를 하다가 숨진 19세 비정규직 청년의 영전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미안해했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래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백남기 대책위’ 이름 앞에 ‘생명과 평화의 일꾼’이라는 수식어를 넣었다. 생존위기에 몰린 이 땅의 농민들에게 영원한 ‘생명’ ‘평화’가 되라는 의미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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