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원하기
  •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 오탈자제보

[데스크칼럼] ‘자소서체’를 아십니까

교육개혁, 아이들에게 물어봐라

  •  

cnbnews 도기천기자 |  2018.10.08 08:54:51

[CNB=도기천 편집국장]
 
“정시인데요” “학종이예요” “적성고사 치릅니다” “교과전형입니다” “수능최저 준비합니다” “논술학원 다녀요”

2018년 8월 서울시내 학 사립고등학교 3학년 교실. 담임교사가 학생들의 대입 진로를 파악하고 있다. 

일단 용어부터 보자. 정시는 수학능력시험 준비생을 이른다.
 
나머지는 수시전형인데 이게 상당히 복잡하다. 학생부종합(학종)은 학교생활기록부 위주로, 교과전형은 내신성적 위주로 뽑는 방식이다. 적성고사는 내신성적에 별도의 시험이 더해지는 제도다. 논술전형은 내신과 논술시험으로 선발한다. 수능최저는 수시전형에 1차합격하더라도 수능에서 일정 이상의 점수가 나와야 합격하는 전형으로, 수시와 정시를 합친 형태로 보면 된다. 이 모든 전형에 자기소개서와 면접이 추가되는 대학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이밖에 특기자, 사배자, 특성화고교생 전형 등 수십 가지 제도가 더 있지만 다 말하다가는 날이 샐 것 같다.   

다시 교실 풍경. 

“자~ 학종은 알아서 하구 나머지는 되도록 수업에 집중하자”(교사)
“그냥 수능 모의고사 풀면 안될까요”(학생1)
(망설이던 교사는) “그럼 졸지 말고 자습해라”

그런데도 절반은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다. 잠자는 부류는 크게 두 가지다. 

내신성적이 3학년 1학기까지만 반영되기 때문에 더 이상 공부할 의미가 없는 교과전형 준비생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수능준비생인데 이들은 주로 학교에서 자고 저녁에 모의고사 전문학원을 다닌다. 낮에 자고 밤을 새는 올빼미 스타일이다. 수능 점수로만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렇게 한지 꽤 됐다. 

나머지 깨어있는 절반도 교과목에는 관심이 없다. 수시전형에 대비해 자소서(자기소개서)를 끄적이거나 면접과 연관된 책을 읽거나 모의고사 시험지를 풀고 있다.
     
학생들 간의 갈등도 있다.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가 중요한 수시생들이 주로 학급일을 도맡아 한다. 청소, 학급회계, 선생님 심부름, 교내 행사 준비 등은 이들의 몫. 생기부에 성실·근면·리더십 등이 ‘우수하다’고 적혀야 하기 때문.
 
이러다보니 매사에 다리 뻗고 있는 정시생들이 얄미울 수밖에 없다. 정시생들은 ‘수능 한방’으로 인생이 결정되니 학교일에는 무관심 그 자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래 가장 희한한 문체도 등장했다. 일명 ‘자소서체(자기소개서 문체)’다. 수시 전형이 도입된 초기에는 자소서에 일반적인 나열식 문체가 사용 되다가 점차 진화를 거듭해 요상한(?) 문체가 탄생한 것.  

가령, 학생이 2학년때 축구부 주장을 맡았다면, 과거에는 “스포츠 활동을 통해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정신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라고 쓰면 되지만, 요즘은 희망 전공(정치외교학과일 경우)과 연관지어 “월드컵을 통해 축구가 전세계인과 교류할 수 있는 종목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껴 축구부 주장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팀워크와 리더십을 체험했으며, 이런 경험이 정치외교학과를 지원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라고 서술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문장을 가공해주는 전문컨설팅 업체가 수백, 수천 곳이다. 실제로 축구를 계기로 정외과를 지원한 학생이 몇이나 될까? 

이 충격적인 사실들은 고3생들의 실제 증언을 토대로 했음을 밝힌다. 이 정도라면 사실상 공교육은 이미 죽었다.     

▲입시제도 개선책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 8월29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정시 모집 확대를 비판하고 있고(위 사진), 반대로 공정사회를위한국민모임은 정시를 더 늘리라고 주장하고(아래 사진) 있다. (사진=연합뉴스)


‘무늬만 교육개혁’ 용기 있는 자 나서라 

선거철마다 정치권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절대 교육은 건드리지 마라”

교육제도 개선을 공약하면 반드시 손해 보는 학부모가 생기고 이들 때문에 낙마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년 대선 때 안철수 후보는 기존의 6+3+3 학제를 5+5+2 학제로 개편하겠다는 혁신안을 발표했지만, 변화 시기에 맞물려 있는 자녀를 둔 학모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유치원 공교육화도 본연의 취지와는 달리 국공립 유치원 축소로 오해받으면서 큰 논란을 낳았다. 이것 때문에 그가 낙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은 건드리면 안된다’는 정치권 통설이 어쨌든 증명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대입제도를 간소화 하겠다고 공약했다. 최근 교육부는 정시(수능) 모집 비율을 30%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2022학년도 대학입학제도 개편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수시제도는 매우 복잡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음을 의미한다. 가령 교과 성적은 낮은데 글쓰기에 자신 있는 학생은 논술시험을 보는 대학에 응시하면 유리하다. 반대로 내신은 우수한데 면접에 ‘울렁증’이 있는 학생은 교과전형에 지원하면 된다. 

이처럼 교육제도를 손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공교육을 언제까지 무덤 속에 버려둘 것인가? 

정부는 ‘시민참여단 숙의 프로그램’까지 동원해 해결책을 찾고 있지만 워낙 이해관계가 복잡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교육부 공무원들은 직접 교실에 가서 학생들을 만나봤으면 좋겠다. 취재해보니 학생들은 생각보다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해야 나아진다는 것도 나름 알고 있었다. 

세월호를 겪으며 우리사회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했고, 그릇된 정부를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었던 세대다. 3년간 입시지옥을 견딘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서는 시간당 1만원도 되지 않는 알바에 인생을 쏟고 있는 이 참담한 현실이 잘못된 교육제도에서부터 비롯되지는 않았는지, 많이 늦었지만 깊이 생각할 때다.  

문재인 대통령과 교육부장관은 책상에 앉아 수시·정시 비율 조정을 논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직접 물어봐라.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래 가장 희한한 문체인 자소서체가 어떻게, 왜 탄생했는지를.

(CNB=도기천 편집국장)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