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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텔링] 한진發 총수 논란…누가 ‘주홍글씨’ 새겼나

‘1987의 그림자’ 왜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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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2019.05.22 09:18:20

공정위가 지난 15일 대기업집단의 총수로 신규지정한 구광모 LG 회장, 조원태 한진칼 회장, 박정원 두산 회장(왼쪽부터) (사진=각사 제공)

재벌의 폐해를 견제하기 위해 32년전 도입된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정위가 자산 규모만을 기준으로 대상을 정해 규제를 적용하다 보니, 기업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사업 확장을 꺼리고 있다. 이 제도에 포함된 총수 지정 또한 공정위 임의대로 행해져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가 기업활동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해결책은 없는 걸까. (CNB=도기천 기자)

해마다 세계유일의 ‘총수 논란’
시대 변해도 낡은 제도 그대로
적용 기준 모호해 부작용 속출
재계 “글로벌환경 맞게 바꿔야”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냈다”

1988년 12월 ‘5공 비리 청문회’ 때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국회에서 한 말이다. 정 회장 외에도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산업 부회장 등이 증인석에 앉았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경호실장이던 장세동 씨는 일해재단을 만들어 3년간 대기업들로부터 598억원을 걷었다. 이 돈은 민주화를 탄압하는 각종 정치공작에 쓰였고, 돈을 낸 기업은 금융지원·세재혜택 등 특혜를 받았다.

이런 폐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80년대 후반 경제 분야에 도입된 게 ‘대기업 지정 제도(대규모기업 집단지정제도)’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987년 제도 시행 이래 매년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을 정해 각종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시장지배력 남용, 불공정거래행위, 불법적인 경영승계, 각종 비리행위 등을 막겠다는 취지다.

자산규모 5조원 이상은 내부거래와 비상장회사 중요사항 등에 대한 공시 및 신고의무가 생기고 총수일가 사익편취가 금지된다. 10조원을 넘으면 상호출자 및 순환출자 금지, 채무보증 금지,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 등이 추가로 적용된다.

최근에는 카카오와 HDC(옛 현대산업개발)이 자산규모 10조원을 넘어서며 상호출자 금지 등의 규제를 받게 됐으며, 자산 5조원을 넘긴 애경과 다우키움은 중요 결정사항 공시 등의 의무가 생겼다. 애경은 마포 신사옥 준공 등으로 자산이 늘었고 다우키움은 사모투자전문회사(PEF)와 투자목적회사(SPC) 등이 늘어 규제대상이 됐다.

특히 공정위는 대상기업을 정할 때 총수(공정거래법상 동일인)를 함께 지정하고 있다. 탈세, 횡령, 정경유착 등 비리가 발생했을 때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총수는 기업집단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진 사람으로, 누가 되느냐에 따라 특수관계인(배우자,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계열사 범위가 바뀌게 된다.

올해는 지난 15일 조원태 한진칼 회장, 구광모 LG 회장, 박정원 두산 회장이 새롭게 총수에 지정됐다. 조 회장은 부친인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이 별세하면서 공정위로부터 직권지정 됐으며, LG는 작년 5월 구본무 전 회장이 타계 하면서 아들인 구 회장으로, 두산은 고 박용곤 명예회장에서 박 회장으로 각각 바뀌었다.

공정위에 따르면 5월 기준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기업은 59개며, 이 중 자산총액이 10조원을 넘는 곳은 34개다.

 

공정위의 이해진 네이버 창업주에 대한 총수 지정은 당시 국정감사에서도 논란이 됐다. 이 창업자자(왼쪽)가 2017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총수 싫어” 해묵은 논란 ‘왜’

문제는 이 제도가 기업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총수는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의 지배자’를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총수=재벌’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재벌 총수’라는 단어가 정립됐다. 재벌과 국가권력 간의 밀월 관계는 건국 이래 계속돼 왔으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또한 ‘정경유착’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재벌 집단을 적폐·구태세력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러다보니 공정위의 총수 지정을 거부하는 경우까지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9월 이해진 네이버 창업주와 공정위 간의 갈등이다.

이 창업주는 공정위가 자신을 총수로 지정하자 직접 공정위를 방문해 자신의 네이버 지분이 4%를 조금 넘는 수준인데다 순환출자도 없으며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를 갖고 있어 재벌체제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이 창업주가 회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판단해 총수로 확정했다.

당시 이 창업주는 “기업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 시각이 기업집단제도가 탄생한 30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남겼다. 다수의 민간기업에 민주적인 경영방식이 도입됐음에도 여전히 재벌과 총수 개념으로 기업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가 뚜렷한 기준 없이 총수를 지정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회장은 지난 3월 핵심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의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최근 공정위 심사에서 총수 자리를 유지했다.

이웅열 코오롱 회장은 1996년 회장직에 올랐지만 총수로 지정된 건 2008년이다. 작년 11월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퇴임했음에도 지금까지 공정위 사전에 총수로 등재돼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정의선 총괄 수석부회장이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음에도 부친인 정몽구 회장이 총수 자리를 지켰다. 공정위는 정 회장의 건강상태에 대한 의사 소견서까지 받아 검토한 결과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지장이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삼성그룹은 지난해 총수가 이재용 부회장으로 바뀌었다. 삼성과 현대차 모두 오너3세가 지배하고 있지만 한 사람은 ‘총수’, 한 사람은 ‘그냥 부회장’인 셈이다.

 

주요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 구광모 LG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사진=연합뉴스)
 

이재용·신동빈·조원태 ‘삼인삼색’ 사연

심지어 공정위의 임의적인 총수 지정이 기업 내부 문제에 영향을 끼친 경우도 있다.

조원태 한진칼 회장은 부친인 고 조양호 회장이 지난달 숙환으로 타계하면서 공정위로부터 총수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는 한진그룹의 의사와는 무관하다. 한진은 조 회장의 총수 자격을 둘러싼 불협화음으로 공정위가 정한 기간 내에 동일인(총수) 변경 신청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공정위가 직권으로 조 회장을 총수로 지정한 것이다.

이런 행위는 오너 일가의 지분상속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현재 고 조양호 회장이 보유한 한진칼 보통주 1055만3258주(17.84%)에 대한 상속 절차가 진행 중인데, 공정위로부터 총수 자격을 획득한 조 회장이 상속지분에 있어 기득권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조 회장이 가족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공정위 덕을 보거나, 반대로 경영권 분쟁의 갈등이 더 커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최악의 경우, 공정위가 가족 불화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비슷한 사례는 더 있다. 공정위는 롯데가(家) 형제 간의 분쟁이 진행 중인 지난해 5월 롯데그룹 총수를 신격호 명예회장에서 신 명예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회장으로 바꿨다.

이미 오래전부터 신동빈 회장이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해왔다는 점에서 자연스런 교체로 보였지만, 신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던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총수 지정에 반발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후 주주총회에서 신 회장이 승리함으로써 끝을 맺었지만, 결과적으로 공정위가 신 회장에게 힘을 실어준 셈이 됐다.

희대의 재판으로 불리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에서도 총수 지정이 논란이 됐었다.

특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박근혜·최순실 측을 로비했다고 봤다. 삼성이 이 부회장의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하는 과정에 정부가 도움을 줬고, 이에 대한 대가로 삼성이 최순실씨 등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논리였다.

재판이 한창인 작년 1월 공정위는 삼성의 총수로 이재용 부회장을 지정한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이 건강문제로 수년째 경영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 부회장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해 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이 부회장에게 경영권이 승계됐음을 시사한다. 공정위 논리대로라면 청탁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 부회장은 당시 공판에서 “회장님 와병 이후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다. 왜 대통령에게 뇌물까지 줘가면서 승계를 청탁 하겠나”며 항변했다.

공정위 발표 직후인 작년 2월 항소심 재판부는 “승계작업이 존재하지 않고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부정한 청탁도 없었다”고 판결했다. 공정위가 뜻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재판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88년 12월 ‘5공비리 국회 청문회’에 참석해 선서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왼쪽부터), 장세동 전 안기부장,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는 이 시절에 탄생했다. (사진=연합뉴스)
 

‘엿장수 맘대로’는 위험

이처럼 공정위의 중구난방식 총수 지정은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는 총수를 지정하는 법적기준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정위 스스로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만 뚜렷한 답이 없는 상태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제도이다 보니 해외사례를 참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제도가 유지되는데는 일부 동양권 국가의 특성인 ‘기업상속 문화’가 배경이 되고 있다. 기업이 승계된다는 것은 그만큼 오너 일가의 지배력이 크다는 의미다. 이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책이 지금의 ‘대기업 집단(총수) 지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대부분 선진국에서 이런 개념은 생소할 뿐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CNB에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총수’라는 단어 자체가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산물로 현재의 글로벌 추세와는 전혀 맞지 않다”며 “총수(대기업집단)로 지정되지 않으려고 투자와 사업확대를 꺼리는 분위기마저 형성되고 있는 만큼, 달라진 환경에 맞게 제도를 개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는 CNB에 “지금의 기업집단제도는 대가족시대에 횡횡하던 가족경영을 잣대로 삼고 있다”며 “전문경영인 중심의 기업마저 일정 자산이 되면 규제대상 대기업집단에 편입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자산총액으로 따질게 아니라 지분구조와 출자현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일정 기준을 충족할 때만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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