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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현대그룹, 자동차 지키려다 5공 신군부에 찍혔다"

[MB회고록 비화] “신군부 재계 탄압에 피눈물”…전두환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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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15.02.03 12:28:47

▲‘대통령의 시간’ 회고록 탈고 후 가족들과 외국에 나갔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왼쪽). 정주영 현대 회장의 생전 모습. (사진=현대그룹,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통해 집권 시절 4대강 사업, 자원 외교, 대북정책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회고록에 소개된 1980년대 초 신군부의 재계 탄압 실상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보안사에 세 차례나 불려 다니면서 현대그룹이 자동차 사업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다 ‘피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CNB가 당시 상황을 회고록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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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보안사 네 차례 불려가 회유·협박당해
정주영, MB 향해 “당신 눈에 피눈물 맺혔어”

이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숨진 1979년 10월 26일 직후 발생한 12.12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내세워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의 일화를 비교적 상세히 알리고 있다.

이 전 대통령과 현대가(家)와의 인연은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대 학생회장으로서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6.3시위를 주도하다 6개월의 옥고도 치른 이 전 대통령은 그해 5월, 24세의 나이에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이후 상무와 전무, 부사장을 거쳐 1977년, 36세에 사장이 됐다. 그동안 현대건설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종합상사 등 굵직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 모회사로 거듭났다.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현대의 승승장구는 계속되는 듯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연이어 12·12사태가 터지며 중대 위기를 맞게 된다.

12·12를 통해 정국을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등 젊은 장교들은 이른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서슬퍼런 철권통치에 돌입했다.

광주항쟁을 비롯,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무력 진압하는 한편 ‘사회정화작업’을 내세워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신군부는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이라는 경제정책을 들고 나왔다.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화학공업의 중복 투자를 통합한다는 정책이었다. 주요 그룹의 계열사 166개를 1984년까지 강제 정리하겠다는 것.
 

▲지난 2007년 8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 자택을 방문해 악수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80년대초 신군부가 현대그룹에게 자동차사업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DB)

이는 말이 투자조정이지 사실상 강제로 민간 기업을 빼앗아 공사화 하는 통폐합이었다. 재계는 자유시장 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발했지만 오래 버티진 못했다.

대표적인 경제단체인 대한상의,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장이 신군부의 입맛에 따라 고분고분한 사람들로 교체됐다.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정주영만이 겨우 전국경제인총연합회(전경련) 회장직을 연임할 수 있었다.

이 정책으로 현대그룹은 현대자동차와 발전설비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막 세계로 진출하려던 시점이었다. 발전설비 역시 그동안 많은 투자를 했던 현대건설의 주력 업종이었다. 어느 것을 잃든 현대그룹으로서는 큰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정 회장은 자동차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자 그룹의 중역이었던 이 전 대통령은 정 회장의 이런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에 출두했다. 하지만 보안사는 현대그룹이 자동차를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그는 보안사에 세 차례나 불려 다니며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네 번째 보안사에 불려갈 때 정 회장은 도장을 내줬다. 이 전 대통령에 따르면 당시 정 회장은 “가서 노력해보고 안 되면 최종적으로 합의해줄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당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TBC 방송사를 포기하자 정 회장은 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도장을 받아들고 보안사에 출석했다. 내가 기댈 것은 ‘시장경제의 경쟁원리’라는 원칙론밖에 없었다. 국가경제는 기업의 건전한 경쟁을 통해 발전한다고 말했지만 신군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도장을 건넸다.
“내 손으로는 도장을 못 찍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당신들이 찍으시오.”
한 장교가 도장을 들고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내 의중을 간파한 책임자급 장교가 그를 제지하며 벌떡 일어났다. 자신들이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문제될 수 있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 장교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사람, 아직 정신 못 차렸네! 빌어먹을! 당장 나가!”
보안사를 나오니 이미 새벽녘이었다. 현대 사옥 앞을 지나는데 정 회장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정 회장은 모두 퇴근하고 텅 빈 회사에 남아 밤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정 회장 사무실로 올라갔다. 들어서는 나를 보고 정 회장이 물었다.
“도장 찍어줬나”
“안 찍었습니다. 내일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정 회장은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이, 당신 눈에서 피가 나고 있어.”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정말 내 눈에 붉은 액체가 고여 있었다. 손수건으로 닦아보니 피눈물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피눈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두환 정권은 결국 현대의 자동차사업을 가져가지 못했다. 신군부가 뜻을 펴지 못한 데는 정주영 회장의 뚝심이 작용했다. 정 회장은 신군부의 칼날에 정면으로 맞선 거의 유일한 경제인이었다.

정 회장은 신군부가 산업구조조정에 나서자 한 경제인모임에서 “한국이 사회주의도 아닌데 정부가 민간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한다”며 반발했다.

이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정부는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정 회장을 어떻게든 끌어 내리려 했다. 신군부는 정 회장의 전경련 회장 임기가 끝나는 1981년 2월 정기총회에 맞춰 후임자를 내정하는 등 치밀한 시나리오를 짰다.

하지만 이 각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 회장의 리더쉽을 믿었던 재계 총수들이  만장일치로 전 회장을 연임 시킨 것이다. 당시 롯데그룹 유창순 회장 등의 용기 있는 태도가 숨죽이고 있던 회의장 분위기를 크게 바꿨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현대는 전두환 정권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됐지만, 정 회장은 자동차를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정 회장에게 권력에 대한 환멸과 동경이라는 모순된 정서를 심어줬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신군부의 압력이 정 회장으로 하여금 후일 대통령에 출마하기로 결심하게 된 배경이 된 것 같다”고 전했다.  

▲범 현대가(家) 가계도 (연합뉴스)

정주영-이명박, 모질고도 질긴 인연

이후 이 전 대통령은 1988년 3월, 46세에 현대건설 회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정 회장을 등에 업고 구소련(러시아)과 에너지 사업을 추진하는 등 대북방 경제교류의 첫발을 내딛기도 했지만, 정 회장이 1992년 1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결별하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은 정 회장과 다른 길을 걷게 된 배경에 대해 “현대라는 재벌이 정치 참여를 통해 권력을 갖게 됐을 때 사회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했지만, 재벌 총수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이 내가 정 회장의 창당에 반대한 이유였다”고 밝히고 있다.

현대그룹을 떠난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5월,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4년 뒤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서 4선의 이종찬 의원과 노무현 후보 등 쟁쟁한 후보들과 격돌해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될 처지에 놓이자 의원직을 사퇴했다. 서울시장 경선에도 두 차례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판매대에 진열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다 2002년 세 번째 서울시장 도전에서 민주당 김민석 의원과 맞붙어 당선됐다. 이후 청계천 복원사업, 지하철과 버스 환승체계 수립, 중앙차로제 도입 등 대중교통개혁을 밀어붙여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여세를 몰아 2007년 대권에 도전했고, 당내 경선에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전 대표를 누르고 여권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선거 과정에서 BBK주가조작 사건과 서울 도곡동 땅 차명소유 논란 등 위기가 있었지만,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심리를 내세우며 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반면 정 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 김대중 민주당 후보 등과 맞붙어 고배를 마셨고, 이후 현대그룹은 2000년 3월 이른바 ‘왕자의 난’을 거치며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건설 등이 그룹에서 분리되는 등 수년간 진통을 겪었다.  

한편 이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 언급된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신군부 수뇌부)은 이번에도 입장을 내놓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2011년)에서도 부림사건, 5공청문회 등에 언급됐지만 일체 함구했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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