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기자 |
2025.10.02 14:10:38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재명 대통령과 샘 올트먼 오픈AI(챗GPT 개발-운영 업체) CEO의 지난 1일 면담을 ‘세계적 이벤트’로 성격 규정했습니다.
오픈AI가 추진 중인 전세계적 AI 데이터센터 건립 계획인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한국의 본격 참여가 선언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올트먼 “한국 메모리 없으면 AI 불가능”
올트먼은 이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대통령실은 전했습니다. “한국 제조업 베이스는 세계 최고다. 이런 산업 기반이 AI에 필수적이다. 특히 삼성과 SK와의 파트너십이 매우 기쁘다. 한국 없이는 전 세계가 AI를 발전시킬 수 없고 이는 과장이 아니다. 실리콘 밸리에는 ‘Singularity is memory(특이점은 메모리칩에 달려 있다)’라는 말이 있다.”
Singularity(싱귤래러티: 특이점)라는 단어는,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 또는 지점을 말하지요. ‘싱귤래러티는 메모리다’라는 말에 AI의 발전에 메모리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필요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2022년 챗GPT를 전격 발표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샘 올트먼은 이른바 ‘AI(인공지능)의 세계 대통령’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인물입니다.
그가 1일 이 대통령을 이재명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만난 데는 2029년부터 삼성-SK로부터 엄청난 물량의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받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랍니다. 삼성-SK와 맺은 LOI(의향서)에는 “2029년부터 연간 웨이퍼 90만 개를 공급받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으며, 이 물량은 두 업체의 한 달 생산 전량에 해당한답니다. 현재 기준으로 전체 생산 물량의 12분의 1을 오픈AI가 차지하겠다니 삼성-SK는 당장 엄청난 생산시설 확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전남-포항 AIDC, 시작 규모는 작지만
오픈AI가 한국으로 이끌린 근본 원인은 물론 삼성-SK라는 두 초거대 메모리 반도체 생산기업 덕분이지만, 이번 이 대통령과의 면담에서는 또한 오픈AI가 SK와 합작해 전남에, 그리고 삼성과는 포항에 각각 AI데이터센터(AIDC)를 건립한다는 내용도 발표돼 관심을 끌었습니다.
물론 전남-포항의 AIDC 건립 계획은 큰 규모는 아닙니다. 당장은 20메가와트 정도를 계획 중이라니 지난 6월 SK와 AWS(아마존웹서비스)가 울산에 1기가, 7조 원 규모로 짓기로 한 데이터센터에 비하면 50분의 1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수도권으로 쏠리면서 ‘지방은 망한다’는 상식이 횡행하는 요즘, 올트먼이 “삼성-SK와의 파트너십으로부터 오픈AI가 받는 혜택의 일부를 한국에 돌려주고 싶다”는 차원에서 전남과 포항 두 지방에 AIDC를 짓는 첫발을 내딛는다는 의미는 향후 확장 가능성을 생각할 때 결코 작지 않지요.
이는 특히 “한국을 아시아-태평양의 AI 수도로 만들겠다”며 하이퍼스케일(초거대 규모) 투자를 약속한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의 약속과 연계해서도 그렀습니다. 전남과 포항에 오픈AI의 AIDC가 일단 들어서면, 핑크 회장이 약속한 ‘AIDC + 재생에너지’ 클러스터가 전남, 포항 등 한국의 지방으로 ‘덧붙여’ 들어가기 더 좋은 환경이 우선적으로 조성되기 때문입니다.
김 정책실장은 전남과 포항이 선택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픈AI의 데이터센터를 전남과 포항에 짓겠다는 거는 다분히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사실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데이터센터를 지으면 아시아 허브로 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신재생 에너지 특구 같은 정책으로 뒷받침하고 거의 마무리 단계인 산단 특별법으로 전기료를 책정해 주는 등의 인센티브들이 망라돼 있거든요. 그런 정책을 저희가 일관되게 설명했고, 설득도 많이 했고. 그런 노력들을 정부가 지난 몇 개월 동안 일관되게 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책이 시장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으니
이 대통령은 지난 9월 30일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한국의 유난히 높은 농수산물 가격을 문제 삼으면서 “정책이 시장을 이길 수 없지만, 시장도 정부 정책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신자유주의라는 걸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모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이 팽배했습니다. 경제학자 김태유 전 서울대 교수가 펴낸 ‘선착의 효’라는 책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한국의) 도로, 항만, 공항 등 주요 인프라는 1990~2008년에 크게 늘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 정부의 공공산업 투자가 급격히 변화하였다. 수출 지향에서 내수산업 육성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수출 중심 첨단산업에 필요한 인프라 투자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242쪽)
신자유주의가 풍미하면서 정부가 특정 산업을 보호하고 키운다는 이른바 ‘산업 정책’이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집권 이후 한국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문장입니다.
지구촌의 산업화라는 게 영국이란 나라는 스스로 알아서 산업혁명을 일궜지만, 그 이후에 등장한 산업국가들, 즉 독일, 미국, 일본, 대만, 한국, 중국 등은 모조리 관세와 보호무역 등을 통해 자국 산업을 정책적으로 키우면서 영국식 산업혁명을 이뤄냈다는 게 김태유 교수의 해석입니다.
산업화의 막차를 타면서 정부의 산업 정책에 국민 전체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동참한 게 한국 산업화의 大역사인데, 신자유주의가 풍미하면서 “정부가 할 일은 없다. 그냥 시장에 다 맡기면 된다”고 방기한 결과가 극히 최근까지의 한국 경제 풍경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019년 팬데믹 이후 지구촌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미국을 필두로 전세계가 보호무역 또는 정부 돈으로 전략 산업 키우기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산업 정책’을 세우고 추진하는 데 세계 1등이었던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산업 정책을 완전 포기하는 낙제생으로 떨어졌다가 이제 미국 등의 움직임에 한국도 화들짝 놀라 이재명 대통령부터 나라의 총력을 기울여 AI 산업 등을 키우겠다며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가 총력을 동원한들 자금력에서나 인구 면에서나 미국, 중국, EU 등을 당해내기 힘든 측면이 있었는데, 이제 이재명 정부의 지난 서너달 노력으로 래리 핑크 회장의 약속부터 올트먼 CEO의 약속까지, 즉 세계의 막대한 자금이 한국을 눈여겨보면서 한국을 아시아-태평양의 AI 수도로 만드는 흐름이 이어지는 모양새로 바뀌었습니다.
아마존-오픈AI 이어 구글까지?
김 정책실장은 1일 브리핑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지었습니다. “오픈AI 관련 얘기가 나온 게 3~4개월 정도 전이었다. 지금 기업 대 기업으로 구글과 한국 두어 군데 기업과 각각 다른 영역에서 논의를 하고 있는 걸로 듣고 있다. 구글이 10~15군데 후보지를 놓고 좁혀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마 몇 달 후에 그것까지 한국에 파트너십으로 자리를 잡으면, 그런 성과가 나오면 굉장히 개가가 되겠다”라고. 오픈AI를 정부가 전남-포항으로 이끌었듯 AI의 원조 대장 격인(가장 먼저 AI 개발에 나선) 구글까지 한국을 투자처로 선택하도록 만들겠다는 암시인 것이지요.
그간 시장 만능주의로 흘러 거의 20년을 허송세월한 한국의 정권이 이재명 국민주권정부로 바뀌면서 이제 ‘시장이 (한국) 정부의 정책에 끌어당겨지는’ 모습을 얼마나 그려갈 수 있을지 흥미진진해지는 순간들이 이어지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