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전격 지명 뒤 특히 보수 쪽에서 소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조선일보는 31일 [이혜훈부터 지자체 의원까지… 與에 ‘빈집털이’ 당하는 국힘]이라는 기사를 냈습니다.
수도권 출마를 준비 중인 국민의힘의 한 원외 당협위원장이 “우리 당이 (이념 지형에서) 오른쪽 끝으로 내달리는 가운데 민주당이 텅 빈 중원을 빈집털이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보도입니다.
오른쪽의 집을 비워두고 오른쪽 끝으로만 달려가면, 오른쪽 중간 집은 비워지게 마련이며, ‘책으로 세상을 배우지 않아’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 이재명 대통령 같은 ‘천재급 실용주의자’가 이런 빈 자리를 놔두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이혜훈 지명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이슈 만들기’ 측면에서는 이 대통령의 지명은 신의 한 수라고 할 만 합니다.
이슈를 제대로 골라내면 세상이 쩍 하고 갈라집니다. 쩍 갈라지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건 이슈가 아닙니다. 쩍 소리가 나게 세상을 반쪽으로 가르면서도 승산을 가져가는 게 바로 ‘이기는 이슈 메이킹’이지요.
이-김 보며 “이제야 가는구나”
이혜훈 후보자와 김성식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의 지명 소식을 들으면서 필자에게 든 첫 생각은 “아, 이제야 가는군”이었습니다.
과거에 이 둘의 행보를 보면서 “왜 저런 성향이 저 당(새누리당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자칭 보수 정당)에 남아 있지? 이해가 안 되네”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이혜훈은 그간 여러 인터뷰 등에서 “당이 나를 쫓아내려 한 뒷이야기”를 했습니다. 2016년 이른바 ‘진박 감별사’들이 이혜훈이 속한 ‘유승민 계’를 쫓아내려 했던 것, 그리고 2020년 총선 때 서초갑 지역구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당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혜훈-김성식 같은 이른바 ‘개혁적 보수’들이 국민의힘 계열에서 힘들게나마 활동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민본 21’(2008년 결성) 같은 개혁적 보수의 흐름이 부분적으로나마 용인됐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흐름이 최근 거의 완전히 사라졌고, 국민의힘에선 TK(대구-경북) 지역구 또는 극우 유튜버들이 용인하는 세력 아니면 설 자리가 없다는 한탄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 상황
당내 개혁 세력을 더 이상 품을 수 없는 국민의힘 상황은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미국 공화당의 상황과도 비교됩니다.
과거의 미국엔 헤리티지 재단 같은 대규모 보수 싱크탱크들이 정교한 보수 정책 구상을 내놓았었지요. 하지만 트럼프 재집권 뒤에는 보수 엘리트들이 내놓는 이러한 정책 구상이 힘을 못 쓰고 있습니다. “외국인만 몰아내면 과거 미국의 영광이 되살아난다”는 감정적 구호만 휘몰아치는 ‘마가(MAGA)’ 같은 대중 추수운동에 맥을 못 추는 것이지요.
그래도 미국에선 트럼프의 ‘의회 경시’에 항의해 집권 공화당의 상-하원 의원 중 무려 30명이 불출마를 선언했다니 그래도 아직 ‘보수의 양심’이 완전히 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자본주의의 심장’이라는 뉴욕에서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를 내건 조란 맘다니가 시장으로 당선됐습니다. ‘사회주의’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뉴욕에서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내건 무슬림 시장을 시민들이 선택했다는 데서 미국의 저력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 보수 본류가 이처럼 완전히 죽지 않은 반면, 한국 보수의 요즘은 처참합니다.
한국 진보와 보수의 현재를 비교하자면, 진보 진영엔 그래도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와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같은 유튜브 언론들이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것 같아요.
반면 한국 보수엔 중심, 또는 브레인이 아예 없어진 느낌입니다. 과거 보수 공론장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조선일보 같은 ‘재래식 언론’(기성 언론에 대한 유시민 작가의 표현)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지요.
또한 삼성경제연구소 같은 대기업 부설 연구소들이 과거 노무현 정권 때만 해도 큰 힘을 발휘했지만, 이제 삼성 같은 글로벌 기업 연구소들은 비좁고 하찮고 위험한(자칫 여론의 뭇매를 맞기 쉬운) 국내 문제보다는 기업의 생존을 가를 글로벌 이슈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입니다.
진보 진영의 머리와 입(시민단체와 언론)이 살아 기능하고, 보수 진영의 그것은 말라가고 있다면, 진보는 더 흥하고 보수는 더 쪼그라들겠지요?
“민주당은 중도”라고 선언한 이 대통령이 이혜훈-김성식 같은 ‘보수의 왼쪽’과 손잡는 건 당연한 행보입니다. 이 당연한 행보에 국민의힘이 크게 놀랐다니, 놀라워하는 표정이 더 놀랍네요. 아니, 대문을 열어 놓고 장기간 집을 비우면서도 집에 아무도 안 들어갈 것이라 자신했던 모양입니다.
맘다니의 민주적 사회주의
필자 개인의 궁금증은, 민주당이 앞으로 오른쪽 빈집 털이를 더욱 활발히 한다면, 왼쪽에도 빈집이 나오기 시작할 텐데, 여기는 누가 들어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미국에선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버니 샌더스가 2016년과 2020년 대선에서 돌풍을 일부 일으켰었으나 좌절했습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금기야”라는 영원한 진리가 또 증명되는 듯 했지요. 그런데 2025년엔 맘다니가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당선됐습니다.
민주당은 진보 정당이 아닙니다. 그저 ‘육법당’(육사와 서울법대 출신이라는 양대 산맥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전통 보수 당)에 맞서다 보니 '편의상' 진보로 분류됐을 뿐입니다. 국민의힘의 ‘오른쪽 끝 장기 외유’ 덕에 제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지요.
남은 큰 과제는, 비어가는 한국의 왼쪽에 ‘한국의 맘다니’가 나올지 안 나올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