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이 가구가 되는 전환점
주문 제작이란 본래 뜻처럼
실내 공간에 딱 맞게 만들어
잘 지은 이름에는 풍미가 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어느 시집 제목처럼 거듭 떠오르는 향취가 있다. 이른바 ’작명의 미(味)학‘이다. 산업계에도 이런 말맛나는 명칭이 많다. 본질을 꿰뚫는 맛깔나는 이름부터 그 안에 품은 이야기까지 한번에 살펴본다. <편집자주>
영국에서 유래한 비스포크(Bespoke)는 ‘특정 고객을 위해 예약된 것’(to be spoken for)이란 뜻이다. 폭넓게 보면 ‘주문 제작’이지만 개인 취향에 맞춰 제작한 양복이란 의미로 보통 쓰인다. 이미 완성된 기성복, 제작 과정에서 착장하는 이의 일부 기호만 반영하는 맞춤 정장과는 다르다. 훨씬 깊숙이 개입한다. 원단, 디자인, 자세 등 하나부터 열까지 ‘한 명’에 맞춰 제작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를 위한, 나만의 것이 바로 비스포크다.
일반적인 맞춤을 뛰어넘는 ‘초맞춤’이기 때문에 양복점 거리에선 ‘00비스포크’란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고객이 안감, 버튼과 같은 작은 부분까지 선택할 수 있다. 재단사는 고객의 어깨 기울기와 골반 모양 등 체형을 세세히 분석하고 저마다 다른 신체 구조를 따져 하나뿐인 양복을 완성한다. 비스포크 슈트(suit), 줄여서 비스포크의 탄생 과정이다.
집에 입히는 맞춤 가전의 시작
몸에 딱 맞게 휘감기는 비스포크란 개념을 가전(家電)으로 옮긴 쪽은 삼성전자다. 명명도 그대로 했다. 지난 2019년 6월의 일이다. 가전이 가구가 되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비스포크’(Bespoke)를 내세워 집이 가전을 입는 전환기를 마련했다.
삼성전자는 당시 생활가전 사업의 새로운 비전인 ‘프로젝트 프리즘(Project PRISM)’를 공개하면서 비스포크 신제품을 선보였다. 내세운 것은 ‘표준화’가 아닌 ‘개인화’. 규격화된 가전의 틀을 깬 첫걸음이었다. ‘되다(BE)’와 ‘말하다(SPEAK)’란 단어의 조합처럼 소비자에게 제품의 색상, 소재, 디자인 등을 고를 선택권을 줬다. 가령 냉장고 도어의 색상을 취향에 따라 조합해 나만의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비스포크 라인업의 스타트를 끊은 냉장고는 승승장구했다. 출시 5년 만에 국내 누적 판매량 300만대를 돌파했는데 이는 5년간 1분에 1대꼴로 판매된 셈이다. 소비자를 먼저 고려하자 소비자가 반응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냉장고에 이어 세탁기, 건조기, 에어컨, 전자레인지, 식기세척기 등으로 비스포크 라인업을 확대하며 ‘맞춤형 가전’이 집안 곳곳에 자리잡게 했다.
디자인 이상의 기능까지 맞춤형으로
매년 새로운 전략을 세우며 집안에서 영향력을 확장한 결과다. 확연히 보이는 디자인 요소뿐 아니라 AI 등 기능을 고도화해 개인 입맛에 따라 사용하게 하도록 했다.
2021년 생활가전 제품군을 확장하는 ‘비스포크 홈’, 2022년에는 통합 가전 설루션 '스마트싱스 홈 라이프'를 구현해 공간, 시간, 경험의 한계를 넘어 소비자 가치를 확장하겠다는 ‘비스포크 홈 2022’, 2023년에는 지속가능성, 초연결성, 디자인 등 3대 가치를 추구하는 '비스포크 라이프'를 선언했다. 이때 새로운 연결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같은 해 출시되는 모든 비스포크 신제품에 와이파이(Wi-Fi)를 지원하고, AI 기술을 확대 도입했다.
2024년부터 본격적으로 음성 인식 빅스비를 통해 집 안에 연결된 기기들을 원격 제어하는 'AI 홈'을 선언하며 지속적으로 연결성을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비스포크 등장 초기인 2020년에 내건 문구는 여전히 브랜드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가전을 나답게’. 이 역시 작명, 아니 작구(句)의 미학이다.
(CNB뉴스=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