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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남자시계를 찬 딸과 떠나는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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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선명규기자 |  2021.09.01 09:59:41

서울 최대 번화가인 명동의 한 가게에 임대문의 현수막이 붙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아침 출근길에 종종 들르는 샐러드 카페가 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그 가게는 문을 일찍 연다. 이 집은 샐러드가 주력이고 샌드위치와 과일주스가 뒤를 받친다. 주인의 손맛이 얼마나 야무지고 고집스러운지 모든 메뉴는 수제라고 했다. 샐러드에 어울릴만한 소스는 전날 미리 구상하고 샌드위치는 그날 좋은 재료인 계란, 아보카도, 살라미 등으로 다양하게 싼다.

깨끗하기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다. 홀의 정리정돈 상태는 ‘칼각’이고 식탁에서는 광이나서 혹여 부스러기라도 흘릴까 조심스러워진다. 주인은 아마 출근하는 직장인에게 음식을 팔려고 어스름한 새벽부터 장사를 준비했을 것이다. 근처 여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유가 차고도 넘치는데, 우선 순위를 따지면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가장 먼저 거론될 것이다.

삼복더위가 절정을 이룬 어느날 아침 가게를 찾았는데 닫힌 문에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여름휴가를 간다는 내용이었다. 필체가 들떠보였다. 그런데 정보가 하나 빠져 있었다. 간다는 날짜는 명시했는데 돌아오는 날은 언젠 지 알 수 없었다. 무심코 기약없이 떠나는 여행이라 생각했다. 그걸 부러워하고 그러길 바랐다. 표기의 누락이 아니길 소망했다.

빈손으로 버스에 올라타자 문득 예전에 샐러드 포장을 기다리다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내가 찬 투박한 손목시계를 보고 주인이 말했다. 딸이 남자시계를 좋아한다고, 그런 건 비싸냐고 했다. 엄마는 딸의 사치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워낙 고가시계가 많지만 내 것은 저렴한 편이라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남자시계 차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시계는 성별 구분이 무의미해서 취향따라 차는 것이 요즘 유행이라고 답했다. 주인의 딸은 스물 다섯살이라고 했다. 나는 아무거나 차도 멋질 나이라고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가게 문 앞 붙은 ‘CLOSED’가 그날따라 유난히 당차보였다. 일하면서 쌓였을 온갖 응어리가 닫힌 문 안에 그대로 웅크리고 있는 듯해 안도했다. 휴갓길에 가져가지 않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상상했다. 남자시계를 멋스럽게 찬 딸과 어딘가에서 마주하고 있을 모습을. 멋들어진 시계 안에 모녀의 기약없는 2021년 여름이 점점이 기록되어가는 흔적을.

그런데 이게 우화(寓話) 같은 일이란 건 금방 알게 됐다. 일주일 뒤 가게 앞에 임대안내가 붙었다. 내부에 있는 집기는 깔끔한 자태 그대로였다. 휴가 기간에 임대료가 더 싼 곳을 찾아다녔는지 아예 장사를 포기했는 지, 궁금증이 일었으나 해소할 방법은 없었다.

이때 자영업의 위기란 말을 비로소 실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7월 자영업자 수는 556만명인데 이는 집계를 시작한 지난 1982년 이래 최저치다. 전체 취업자에서 자영업 비중도 지난해 24.4%에서 20.1%로 급격히 떨어졌다.

정부의 코로나 정책에 관해선 이견이 혼재되지만 유독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 자영업자에 대한 고려다. 그 효과가 의심스러운 영업시간 제한만이 답이냐는 거다. 일각에선 재난지원금을 자영업자에게 몰아주거나 영업시간을 늘리되 방역수칙을 어긴 사람들에게 더 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중 최선책을 가려내는 게 정부의 몫인데 그저 문을 일찍 닫으라고만 하니 답답하다는 거다.

삼복더위가 물러난 아침, 쾌청한 하늘이 무색하게 샐러드 카페에선 집기를 꺼내는 과격한 소리만이 들렸다. 사람의 음성은 없었다. 둔탁한 소음이 주인의 한탄을 덮었는 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출근길에 들르던 가게가 조용히 사라졌다.

(CNB=선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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