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전시’ 벗어나 빛·색·소리로 느껴
냄새·촉각…축축하고 음산함이 피부에
MZ세대 사이에 입소문, 관람인파 넘쳐
모이지 말고 움직임도 줄이고 마스크 없이는 대화도 금해야 하는 ‘자제의 시대’. 출타는 왠지 눈치 보입니다. 그래서 CNB가 대신 갑니다. 재밌고 새롭고 어쨌든 신선한 곳이라면 어디든가서 발과 눈과 손과 귀에 담은 모든 것을 전해드립니다. 이번 편은 인간의 모든 감각을 자극하는 체험형 전시, 현대백화점의 ‘비욘더로드(BEYOND THE ROAD)’ 이야기입니다. <편집자주>
체험형 전시가 현대 예술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나오는 비판이 있다. 오감을 충족시켜주는 진정한 체험은 없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 명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관람객, 공간, 전시품의 상호작용 관계를 깡그리 무시해 예술적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혹평’까지 나온다.
체험형 전시는 전시회의 질적 하락을 야기한 주범일까? 아니면 단지 변화의 흐름일까? 이러한 갑론을박 속에서 현대백화점의 ‘비욘더로드’는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형 전시를 표방했다. 각각의 공간을 시각·청각·촉각·후각·공간지각 등 다양한 감각을 통해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데 정말 그럴까? ‘사전 정보 없이 느껴보라’는 조언을 마음에 새기고, 지난 7일 더현대 서울에 위치한 비욘더로드를 찾았다.
몰입도 최대치…시각·청각 압도
전시관에 입장하면 전자음이 들리고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온다. 전자음은 몽환적인 사운드로 바뀌고, 빛의 색깔은 시시각각 변한다. 시작부터 ‘조명’과 ‘소리’로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 관람객의 혼을 빼놓는 모습이다.
입구 벽면에는 이번 전시의 설명이 붙어 있다. 일렉트로닉 밴드 ‘엉클(UNKLE)’의 멤버 제임스 라벨의 음악을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 33개의 공간이라고 한다. 모든 공간에서는 엉클의 앨범 ‘더 로드: 파트1, 2’의 주요 트랙을 기반으로 재구성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이를 위해 99개의 스피커, 148개의 특수 조명이 동원됐다고 하니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비욘더로드에는 특별한 동선도, 작품의 설명도 없다. 그저 소리와 조명에 이끌려 감상하면 된다. 빛의 변화, 음악의 흐름, 공간 배치와 구성 등을 직접 해석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도다. 오롯이 감상에만 집중하기 위해 사진 촬영을 자제하라는 설명도 곁들인다.
빛과 소리에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가면 붉고 파란 공간 속에서 여러 방향으로 뚫린 갈림길이 시작된다. 공간마다 설치된 조형물은 제각각이다. 커튼에 가려진 작은 나무, 의자와 티브이, 전화기, 아트 그래픽 등 다양한 설치 작품이 반겨준다.
관람객의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기 위한 시도가 대부분이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빠르게 변화하면 사운드도 빠른 템포로 바뀌고, 작품들이 새롭게 보인다. 음악을 재해석한 작품들이니 청각으로 공간감을 느껴 보라는 의도다.
영상과 음악의 조화보다 음악에만 집중한 작품도 있다. 분홍빛이 가득한 방에서는 영화감독 대니보일의 작품 ‘트러스트’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무선영화 버전이 상영 중인데, 영상은 음악에 맞춰 변화한다. 영상에 소리를 맞추는 일반적인 작품과는 사뭇 다른 시도로 보인다.
이제야 빛과 소리에 적응한다 싶으면 더 화려한 광경이 펼쳐진다. 형광 물질과 자외선(UV)을 사용한 그라피티 작품이 보인다. 엉클의 가사와 메시지가 가득한 복도와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가상현실로 잠입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가장 높은 몰입도를 자랑하는 작품은 미디어 아티스트 더그포스터의 작품 ‘안식처’이다. 예배당을 연상시키는 공간 안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미디어 아트를 보고 있으면 경건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다. 예배당 안에 울려 퍼지는 소리들은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성가’처럼 들린다. 내 안의 안식처와 마주하고 평안을 느끼라는 메시지.
후각과 촉각은 덤…한국적 요소 가미
후각과 촉각도 빼놓을 수 없는 자극 요소다.
붉은 조명이 가득한 방에 들어서면 마스크를 뚫고 강한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향수 디자이너 아지 글래서가 기획한 이 공간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만든 향수 ‘Build and Destroy’의 향이 가득하다. 한쪽 벽면에는 수많은 향수병이 전시돼있다. 향을 구성하는 탑노트, 미들노트, 베이스 등 100여개의 요소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촉각을 자극하는 작품도 존재한다. 컨템퍼러리 아티스트 요나스 버거트의 회화가 전시된 공간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테이블은 녹아버린 촛농으로 뒤덮여 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해당 공간에 들어선 관객들은 모두 테이블에 앉아 굳어버린 촛농을 만져본다. 그리고 그 두께에 놀란다. 촛농의 두께는 지나버린 시간이 매우 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또한, 테이블 옆에는 직접 연주가 가능한 피아노가 존재하는데, 대다수의 관객이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눌러봤다.
‘만진다’ 보다는 ‘느껴진다’ 수준의 촉각도 존재한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작품 ‘로마’를 보고 있으면 습기가 느껴진다. 숲속이 나오는 영상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수증기가 나오고 그 축축함과 음산함이 피부에 닿는다.
한국의 미를 느낄 수 있는 설치 예술도 존재한다. 컨템퍼러리 아티스트 폴리모건과 아이비존슨은 까치와 호랑이를 활용했다. ‘까치와 호랑이’ 민화에서 영감을 받아 태어난 해당 작품들은 한국 전시를 위해 존재한다. 좋은 소식을 전하고 반짝이는 물건을 수집하는 까치를 통해 음악을 콜렉팅하는 자신들의 작업을 상징했다.
색다른 예술 경험…새로운 가치 제공
비욘더로드의 전시 형식은 동적이고 자유롭다. 다양한 형태의 전시물을 통해 관람객의 감성을 형성하고, 감각적 체험을 충족시켜준다. 또, 현대 예술이 추구하는 것처럼 틀에 얽매이지도 않고 특별한 해석과 의도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총괄 기획자 콜린 나이팅게일과 스티븐 도비가 밝힌 것과 같이 감각이 이끄는 대로 스스로 경험하고 상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중시한다. 이른바 전적으로 관람객에게 맡기는 전시회다.
자율과 체험에 집중해서일까? 비욘더로드는 MZ세대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일 평균 1000명 이상이 관람하고 있다.
체험형 공간에 집중하고 있는 현대백화점의 전략이 맞았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평소 예술에 관심이 높았던 관객들은 전시를 관람한 후에 백화점의 다른 공간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현대백화점 측은 “호응에 힘입어 애초 전시 기간에서 2달가량을 추가해 앵콜전을 진행하고 있다. 더 많은 고객들이 비욘더로드 전시가 주는 새로운 경험을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더현대 서울의 ‘알트원’을 통해 국내 최고 수준의 전시를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고객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CNB=김수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