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대통령 시계를 만들겠다”고 1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좋아요’ 3만 개와 댓글 4800개 이상이 달렸다. 그리고 가장 지지를 많이 받은 댓글들을 보니 대부분이 ‘국민 모두가 갖고 싶어하니 이재명 대통령 시계를 판매해 그 수익금을 좋은 곳에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간 한국에서 대통령 시계는 대통령이 ‘내려주는’ 선물이었다. 따라서 대통령 시계를 선물받은 사람은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랑할 수 있었다. 모 사건에서 피의자가 “박근혜 대통령 시계를 달라고 여당 인사에게 부탁했고 받았다”고 주장한 데서도 이런 사정이 읽힌다.
그런 권위의 상징물, 즉 대통령과 가까운 순서로 받는 ‘하사품’ 성격이었던 대통령 시계를, 이제 국민들이 “만들어 팔아달라”고 적극 요구한다는 데서, 이른바 ‘국민 주권 시대’에 크게 달라진 인식의 변화가 읽혀진다.
‘대통령 상품’이라고 하니,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트럼프 굿즈(goods)’가 떠오른다. 트럼프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MAGA’ 모자를 비롯해 트럼프 스니커즈(운동화에 성조기와 T 대문자를 새김), 금 도금 시계, 심지어 암호화폐까지 다양한 트럼프 브랜드 상품을 판매하며 수천 억 원 대의 이익을 올렸다.
트럼프 브랜드 상품은 경제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Trump 2028’(헌법적으로 불가능한 트럼프의 4년 뒤 재선을 의미) 같은 불법적 구호를 새긴 티셔츠를 판매하고, 판매 업체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호하고, 또한 ‘바이 아메리카’(미국 국산품을 사자)는 트럼프 자신의 구호와는 달리 많은 물품이 동남아 등지에서 생산돼 수입된 사실 등으로 비판 역시 받고 있다.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서는 대통령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상품을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 지지자들은 페이스북 댓글에서 그야말로 ‘건전한’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어 주목된다. 눈길을 끄는 댓글들을 몇 개 소개한다.
“수주 업체는 어려운 중소기업으로 여러 곳에 나누어서(갯수 제한), 판매 수익금은 원가 제외 전액 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거나 부모로부터 외면받은 아이들의 교육-의료 지원비로 쓰면 좋겠어요.”
“대통령님, 판매해주세요. 수익금은 국가 재정으로 쓰시면 어떨까 합니다. 제발 판매해주세요. 갖고 싶어서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못 받으면 속상할 지지자들이 많을 겁니다. 누구도 속상할 일 없게 이재명 굿즈 만들어서 각자 구입하게 하시는 게…. 이익금은 남겨서 좋은 곳에…. 청와대 들어가셔서는 더 다양한 굿즈로….”
“광장에 나왔던 응원봉 국민에게 다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넉넉히 제작해서 (1) 일부는 선물용으로 사용하시고, (2) 나머지는 온라인 경매를 통해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 파세요. 그 기금으로 노동 청소년 장학재단을 세워도 좋구요. 저도 한 10개 사서 이웃에 나눠주고 싶답니다. 물론 저도 하나 갖고 싶답니다.”
X(트위터) 게시물 중에는 이재명 시계 판매 수익금을 독립운동가 후손 지원 등에 쓰자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대통령 시계를 통해 ‘사회적 가치’도 창출하자는 제안이다.
돈만 많은 건 자본주의가 아니다?
전남대 철학과 박구용 교수는 12일 유튜브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에서 11일 이 대통령이 증권시장을 방문해 “주가조작 등 불법으로 돈을 번 사람은 이제 패가망신시키겠다”고 약속한 데 대해 “한국 자본주의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서는 것 같다”고 철학적 해석을 내렸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유발 하라리 저 ‘사피엔스’에 그 해답이 있다.
아담 스미스는 (…) 부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 데 쓴다는 전제다.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지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할 뿐 “수익이 늘면 스크루지는 돈을 상자에 숨겨둘 것이고 세어볼 때나 꺼낼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 자본주의는 ‘자본’을 단순한 ‘부’와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와 자원을 말한다. 반면에 부는 땅에 묻혀 있거나 비생산적 활동에 낭비된다.(441~442쪽)
자본주의는 ‘벌어서 재투자’에 그 근본이 있으며, 따라서 단순히 부를 쌓아놓고 ‘나는 돈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벌어서 재투자’를 실행하도록 하는 대표적인 자본주의적 기관이 증권시장이다. 개개인이 사들인 주식 값은 기업으로 들어가 투자돼 수익을 올려야 하지, 그렇지 못하면 증권시장에서 도태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예컨대 이명박 정부 초기에 유행했던 광고 문구, 즉 “부자 되세요~~”는 ‘부’를 추구하는 구호이지, 자본주의 추구 슬로건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문재인 정권 시절에 한국 부자들 사이에 ‘문 대통령이 화폐개혁을 단행한다더라’는 소문이 맹렬히 돌았을 때 한 금은방에 어떤 부자가 170억 원 현금 다발을 갖고와 170억 원 어치 황금으로 바꿔갔다는 한 일화도 부의 축적일 수는 있어도 자본주의적이지는 않다.
헌데, 11일 이 대통령의 한국거래소 방문 좌담에서도 언급됐듯, 그간 한국 주식시장에서는 이른바 ‘작전 세력’이 주가조작을 해도 당국의 방지 기능이나 적발 뒤 처벌 수준이 워낙 미약해 조작 세력이 날뛰는 판이 돼왔다.
한국 자본주의는 이제서야 바로 서기 시작?
또한 이 대통령의 지적대로 “내가 산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그 송아지는 내 것이 아니라 대주주 것이 되는”, 기가 막히게 오너 일가 또는 대주주에게만 이익을 넘겨주는 이른바 ‘물적분할’ 등이 마구 횡행해 온 게 한국 주식시장이었다.
대통령 시계에 대한 관심이 공공이익적 토론으로 이어지는 모습에서 ‘온전히 서는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를 느끼게 된다. 국민 주권 시대가 열린다는 것은, 주식시장에서도 ‘개미 주권 시대’가 열림을 의미한다. 대주주가 개미들의 등을 따 먹어도 당국과 법원은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취해왔던 한국에서는 참으로 혁명적 변화의 시작일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