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범일동에 가면 자유시장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즐겨 찾는 골목은 돼지국밥 골목과 시계방 골목이다.
특히 시계방 골목은 범일동에서 범내골로 가는 큰길의 이면도로에 있다. 거리 양쪽을 따라 수많은 시계방들이 밀집되어 있어 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3차원의 평면에서 4차원의 시간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가끔 이곳에 들러 수많은 시계와 시간들을 보면서 잠시 현실을 잊기도 한다. 시간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영원히 흐르는 존재가 아니던가.
나에게는 이 골목과 관련된 아련한 추억이 하나있다. 때는 대학 3학년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거리에는 신산하고, 차가운 기운이 퍼져 있었다. 무심코 흘러가는 낙엽의 잔상이 눈을 시리게 하던 날이었다.
당시 나는 시계를 고치러 어느 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시계방 점원과 나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나는 그에게 시계를 맡긴 후 가게를 빠져 나왔다. 그러면서 심각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시계방의 점원이 되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다음 번에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다.
사흘 후, 나의 이런 의문은 그 가게에 다시 갔을 때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이하였고, 나에게 소파에 앉기를 권유하였다. 그리곤 원두커피를 내왔는데, 커피의 그윽한 향이 시계 초침을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조용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대학 1학년 때 그의 아버지가 뺑소니차에 치였고,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시계방의 점원으로 취직했다는 것이었다. 말을 마친 그는 내가 들고 있던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복이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느 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수리비를 주었으나 그는 웃으면서 내 손을 떠밀었다. 그 돈으로 책 한 권을 더 사보라는 말을 덧붙인 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깊은 친구였다. 나는 가끔 이 골목을 지날 때마다 그 친구의 환한 웃음이 생각나곤 한다. 시계방 주인이 꿈이라던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부디 그의 꿈이 이루어졌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