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현대카드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하고 있는 ‘컬처 프로젝트 29 톰 삭스 전’을 보고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던 전성천 박사가 떠올랐다. 유난히 외국인들이 많아서, 뉴욕이나 버지니아주의 골목길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전성천 박사는 일제 시대인 1913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어났다.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미국 예일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정부 대변인 겸 공보실장을 지냈고, 건설사인 전일기업 사장, 언론사인 서울신문 회장, 기독교방송(CBS) 사장, 한국방송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나는 전성천 박사에게 유아세례를 받고 성남교회와 자택, 산성교회 등에서 여러 번 만나 유년과 청년 시절까지 친하게 지냈다.
대학교 2학년 때인 2002년에 전성천 박사에게서 직접 친필 싸인으로 선물로 받은 책 ‘십자가 그늘에서’를 서재에서 꺼내서 다시 읽어봤다. 회고록으로 부제는 ‘경향신문 폐간은 누가 연출했나?’ ‘광주 대단지 7만 군중 폭동의 진실’이다. 우리나라 초기 유학파로 독립과 건국에 많은 영향을 미친 전성천 박사의 파란만장하고 논쟁적이기까지 한 인생을 요약해주는 부제였다. 그만큼 오랫동안 개인적인 기억 외에 기사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때도 난해했지만, 이렇게까지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인지는 몰랐다.
전성천 박사의 막내딸인 전영백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가 직접 집으로 보내준 김병종 서울대학교 미대 명예교수의 책 ‘내 영혼을 만지고 간 책들’에도 이 책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십자가 그늘에서’는 전성천 박사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신학과 유학 시절에 나카무라 목사와 다케다 지시찌 다케다증권 사장, 기사 구라마쓰 외무성 관방장, 평범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친 내용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해방 직전인 1943년 항일투쟁 혐의로 광화문 경기도 경찰국에 검거되어 43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시립중앙병원에 입원했던 기록도 다시 볼 수 있었다. 월드 트레이드 아트 갤러리를 경영한 장남, 초대 금융위원장으로 우리금융그룹 부회장을 지낸 백부의 아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에 대한 내용도 흥미롭다.
‘십자가 그늘에서’를 다시 읽으며 풍부한 사진 자료를 찬찬히 살펴봤다.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부통령, 최인규 내무부 장관, 최두선 동아일보 사장,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 등 당대 정계와 언론계 고위급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수록되어 있었다. 그의 인생사에서 논쟁적이며 직접 발표한 경향신문 폐간 과정에 대해서는 한배호 중앙대학교 교수가 집필한 프린스턴대학교 ‘한국의 정치’ 박사학위 논문 내용을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었다.
이 책에는 이승만 대통령 정부 당시 3·15 부정선거, 4·19혁명 등으로 전성천 목사가 두 번째 수감 생활을 할 당시 일상의 어려움도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 당시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점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수정해야 했을 부분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국무회의에서 4선 출마 결심을 밝혔을 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현재 상황으로는 안 됩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한 내용도 볼 수 있었다. 현재는 대통령 단임제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한 인물이 지나치게 오랫동안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는 행위에 대한 많은 비판과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예일대학교 졸업식 날 최인규 내무부 장관, ‘찔레꽃’으로 알려진 김말봉 소설가와 함께 찍은 사진도 다시 살펴봤다. 1961년에 3·15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함께 서대문교도소에 들어갔던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내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성천 박사는 “그날 나는 식욕을 완전히 잃고 찬물 외에는 아무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후에도 며칠을 두고 침묵과 우울의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며 “최인규와 나는 참 오랜 친구였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7년에 함께 미국 유학을 갔던 사람이고 일찍이 출세해서 외자청장, 교통부 장관, 내무장관 등을 지냈던 또 국회의원까지 되어 예산분과위원장을 거쳐서 국회부의장을 꿈꾸고 있었던 사람이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다른 사진 자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편지이다. 12·12 군사 쿠데타로 광주시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용궁 전씨의 족장인 전상희 선생과 만나 솔직하게 민심의 향배를 알리는 편지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고 한다.
이에 전성천 박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오늘날의 정치 현실이 가파른 대치 상태를 이루는 것들이 많으니 극단적인 경쟁을 피하고 어느 정도 중용정책을 취해야 국내외적으로 지탱할 수 있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강경파와 온건파 중에서 강경파가 더 충성스러워 보이는 법이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충성이 아니라는 것, 본인이 공보실장으로 있을 때 경향신문을 폐간한 것도 자유당 내 강경파들이 그러한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가는 바람에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쳐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정권 차원에서 반드시 잘한 일이 아니었다는 내용도 편지로 보냈다고 한다. 본인이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4선 출마를 반대했다고 곤경에 처했고 그것이 결국 전권을 무너뜨리는 3·15 부정선거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 등을 적었다고 한다.
이런 편지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바쁘신 중에도 잊지 않고 간곡한 진언을 하여 주신 성의에 깊은 사의를 표하는 바이며, 말씀하신 바는 많은 참고가 되리라고 믿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좋은 말씀을 들려주실 것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짧은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 전성천 박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와 저녁식사를 먹고 이번에는 자신이 들어갈 것 같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고, 나의 외가는 전라남도 구례라서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피를 흘린 희생이 있었던 12·12 군사 쿠데타로 인한 정권이 헌법적으로 정당한가를 고려했을 때, 매우 논쟁적이고 비판적으로 검토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후에 전성천 목사는 미국 교수 자리를 거부하고 빈민이 많았던 광주 대단지, 현재 성남시에 성남교회를 설립하고 목회 활동을 하며 평범한 사람들을 돌보는 활동을 이어갔다. 이 친필 싸인책이 내게 전해진 것도 그런 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을 만든 알버트 아인슈타인 박사를 만난 내용도 적혀 있었다. 전성천 박사는 “나는 프린스턴에 도착한지 얼마만에 우연히 거리에서 프린스턴대학 교수인 아인슈타인 박사도 만나게 되었다”며 “아인슈타인 박사는 신학교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 얼른 보기에 그는 원자탄 제조의 가능성을 보증한 학자라기보다 전쟁터에서 갓 피난해 온 노인 같아 보였다”고 한다. 학자로 보이지 않고 노동자 같이 보였으며, 이렇게 순수한 영감이 우주의 상대성 원리와 원자탄의 출현을 생각해냈다는 것은 놀랄 일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미국 유학 생활에 도움을 주거나, 그에게 수업을 해준 사람들의 사진도 다시 살펴봤다. 미국에서 큰 백화점을 경영하던 어니스트 와이코프 씨와 아내인 안나 씨에게 받은 고마움과 즐거움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었다.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며 장학금을 주었다는 리차드 니버 교수(기독교 윤리), 케네스 스콧 라토렛 교수(역사학), 리스턴 파프 교수(사회학), 로버트 카룬 교수(조직 신학)의 사진도 살펴볼 수 있었다.
전성천 박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대학에 다닐 때까지 친필 싸인 책과 그림, 사과, 음악회 초대 등의 추억을 준 사람이다.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해방과 신탁통치, 분단을 거쳐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우리는 많은 갈등과 아픔을 겪어왔는데 그 길에서 다양한 행적을 남긴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민주적이고 평화롭고 지속가능한 경제적 성과를 거두는 대한민국과 한반도, 동북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꿈꾸어 보고는 한다. 이런 사람이 내 곁에 잠시 있었고, 우리 삶에 있었다는 기록을 남겨보고 싶었다.
(CNB뉴스=손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