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모 나가수 꼴찌 심경, 사진=연합뉴스)
김건모 나가수 꼴찌 심경
1990년대 초까지 가요계에는 '한국 가수가 흑인 음악을 하면 실패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레코드사들이 흑인 음악에 거부감을 보이던 시기, 까무잡잡한 얼굴의 김건모는 꽤 호기롭게 등장했다. 그는 1992년 랩 음악인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출사표를 던졌고, 2집에선 레게 음악인 '핑계'로 승부수를 띄웠다.
2집으로 레게 열풍을 일으키며 '밀리언셀러 클럽'에 입성한 그는 3집 '잘못된 만남'으로 판매량 280만장을 기록하며 국내 단일 음반 최다 판매량으로 한국 기네스에 올랐다. 이때부터 김건모에게 '국민 가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성공 신화'의 주인공인 김건모가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지난 26일 신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인터뷰한 김건모는 "그때 한반도가 통일됐다면 3집이 더 팔렸을텐데"라며 "평양, 신의주, 원산 찍고 공연하면서 냉면, 순대도 먹고 재미있었겠다"고 늘 그렇듯 뜬금없는 농부터 던졌다.
김건모는 눈을 두번 깜빡하니 강산이 두번 변했다고 소회를 전했다.
"1990년대보다 많은 가수들이 등장해 음악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건 변한 점이죠. 하지만 백화점으로 치면 제 코너가 점점 작아졌지만 제 브랜드를 파는 매장이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는 게 변하지 않은 점입니다."
이어 김건모는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다"며 "나도 들여다보면 20년간 굴곡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평탄하게 왔다고 생각한다. 이제 반 왔으니 앞으로 20년이 정말 중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가수' 터닝 포인트..충격 딛고 20주년 음반" = 다음 20년에 시동을 걸기 앞서 그는 지난 20년을 녹여낼 기념 음반 '자서전(自敍傳)'을 27일 출시했다.
좋아하는 술까지 줄여가며 이 음반 작업에 온 마음을 쏟은 계기는 MBC TV '나는 가수다'였다. 그는 지난 3월 이 프로그램의 첫 탈락자로 선정됐으나 제작진이 재도전 기회를 부여하며 논란이 일자 자진 하차를 택했다.
"'나는 가수다' 출연은 제 음악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제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죠. 하지만 그때 꼴찌가 아니라 5, 6등을 했다면 전 스스로 바뀌지 않았을 거예요. 탈락해 창피도 당해보며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됐어요. 그래서 6개월 간 이 음반 작업을 하며 자꾸 욕심이 생기더군요."
음반은 여느 기념작처럼 '과거사 재탕'에 그치지 않았다. 신곡을 꽉 채운 13집 CD와 팬클럽이 선곡해준 12집까지의 히트곡을 '발라드'와 '댄스&레게'로 나눠 담은 두장의 CD까지 총 석장의 CD로 패키지를 구성했다.
"지루한 걸 못 참는다"는 그는 13집에서 음악 역량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보였다.
김건모가 작곡한 더블 타이틀곡인 '어제보다 슬픈 오늘'과 '자서전'은 각각 컨트리 송, 힙합이 가미된 로큰롤이다. 펑키한 '숨바꼭질'과 레게인 '선샤인 러버(Sunshine Lover)', 알앤비(R&B)인 '피아노' 등 곡에 맞는 창법들은 때론 케니 로저스, 때론 스티비 원더의 잔향을 느끼게 한다.
김건모의 소속사 대표이자 그를 데뷔시킨 프로듀서로 13집의 작사, 작곡에 참여한 김창환 대표가 인터뷰 자리에 함께 해 설명을 거들었다.
"그간 (김)건모는 여자의 마음을 대변한 노래를 많이 불렀죠. 하지만 이번에는 노랫말에 남자 이야기가 많아요. 건모가 장가는 안 갔지만 중년이잖아요. 중년이 됐는데 애들 노래를 할 수 없으니 건모의 삶에서 바라본 세상 이야기들이 담겼죠."(김창환)
◇"김창환과 결별.재회…방송 은퇴 번복" = 사실 김건모의 음악 인생 20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김창환이다. 김건모는 1집부터 3집까지 김창환과 손잡고 다량의 히트곡을 쏟아냈지만 이후 결별해 음악 침체기를 겪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2008년 12집에서 재회했다.
당시 이들의 재결합은 프로듀싱과 보컬을 맡은 두 멤버가 해체했다가 11년 만에 재결합해 전세계 음악차트를 석권한 독일 남성듀오 모던 토킹(Modern Talking)에 비유됐다.
김창환은 "박미경이 소개해준 김건모는 내가 찾던 목소리였다"며 "오디션에서 피아노를 치며 제임스 잉그램의 '저스트 원스(Just Once)'를 부르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흑인 음악을 건모를 통해 성취했다"고 웃었다.
그러자 김건모는 "김창환 형은 나를 낳아준 사람"이라며 "한때 형이 준 '핑계' '잘못된 만남' 등의 노래가 부르기 싫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형 덕에 국민 가수란 소리를 들었고 이번 음반 작업 때도 어깨에 짐을 덜 수 있었다"고 화답했다.
김건모는 김창환과 떨어져 있던 2003년 방송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무작정 방송이 하기 싫었어요. 웃겨야 했고 빡빡한 스케줄이 힘들었죠. 그땐 아이돌도 없었고 음반에서 디지털 음원 시장으로 전환하는 초창기였으니 이것도 핑계가 안됐어요. 그저 공연으로만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죠. 하지만 번복하고 다시 방송을 하게 됐어요. 이런 점까지 팬들이 보듬어준 20년이네요."
◇"'국민' 칭호 부담..앞으로 20년이 중요" = 그는 앞으로 보낼 20년이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시각장애 솔 가수 레이 찰스(Ray Charles)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레이'의 마지막 자막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과거 10집 작업 때 '레이'를 보는데 '이후 레이 찰스는 25년간 미국 전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란 마지막 자막이 제 머리를 때리더군요. 레이 찰스가 60세부터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했다는데, 전 40대이니 일찍 정신 차려 다행이죠. 20주년 음반을 낸 것도 감지덕지이니 앞으로 저만 잘하면 돼요. 하하."
이어 김건모는 오랜 시간 국민 가수란 칭호가 부담스러웠다는 속내도 털어놓았다.
그는 "아마 국민 여동생, 걸그룹이란 칭호가 붙은 모든 연예인들이 부담될 것"이라며 "이게 일종의 '말 훈장'인데 늘 잘해야 한다고 신경쓰며 살았지만 아름다운 추억들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말 훈장'을 붙여준 히트곡들에 애착이 크다는 김건모는 이 곡들을 '데뷔 20주년 기념 전국투어-자서전'에서 원없이 불러낼 계획이다.
공연은 오는 11월 4-5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을 시작으로 전국 20개 도시에서 열리며 미국 5개 도시와 일본에서도 개최할 예정이다.
김창환은 "김건모의 앞으로 20년은 공연 위주가 될 것"이라며 "건모는 자신의 음악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는 음악 생활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수로선 많은 걸 누렸지만 가정을 꾸리지 못한 아쉬움은 없을까.
김건모는 "솔직히 20년을 맞도록 가장 크게 도와준 건 미혼이란 사실"이라며 "결혼했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바뀌어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할 생각이다. 이상형은 예쁘고 똑똑한 여자다. 곧 나타날 것 같다"고 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