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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뿐인 임진왜란 출병기지, 역사의 섬뜩함 밀려와

CNB미디어 ‘제1회 일본 속 한국 문화탐방’ 성료, 나고야성터 등 둘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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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규슈 = 김경훈기자 |  2016.02.01 18:47:52

날씨 좋은 날, 육지에서 바라 본 바다는 대개 평화롭고 고요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종종 있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관문인 규슈(九州) 서북쪽 히젠 나고야(肥前 名護屋) 성터에서 내려다 본 바다가 그랬다. 왠지 모르게 엄습하게 다가와 섬뜩했다. 이곳은 지금부터 424년 전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만 8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 정벌을 위해 출병한 전진기지다. 우리에겐 치욕과 회한의 역사적 현장이다.

 

지난 1월 23일 종합미디어그룹 CNB미디어(CNB뉴스·CNB저널·SPACE(공간))가 주최한 ‘제1회 일본 속 한국 문화탐방’ 일행을 이끌고 이 자리에 선 이한성 동국대 교수는 “이곳은 특히 국론분열을 일삼는 정치인들과 미래를 짊어질 젊은 세대가 꼭 와서 보고 배워야 할 역사적 현장이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 국가가 나아갈 길을 한번이라도 이곳에서 깨우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CNB미디어가 건축문화예술 월간지 SPACE(공간)의 창간 50주년과 문화경제 주간지 CNB저널의 10주년을 맞아 마련했다.

 

“국론분열 일삼는 정치인들이 꼭 들러야 할 히젠 나고야 성터”      

      

히젠 나고야는 히데요시의 고향 나고야(名古屋, 아이치현 소재)와 발음이 같다. 성을 쌓은 곳은 가쓰오먀마산(勝男山), 길하다는 뜻이 있어 그가 각별히 애정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축성 당시 오사카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8개월 만에 축성했다는 성 안 면적만 약 17만㎡(5만 평), 성곽 둘레는 6㎞에 달했고, 한때 성 안팎에 10만 명 이상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부터 424년 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진기지였던 히젠 나고야 성의 지휘부가 자리했던 천수대에 선 이한성 동국대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와 탐방단 일행.

그러나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폐허로 남아 있다. 일본의 운명을 갈랐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가(家)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일본 천하를 내준 뒤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세력의 재결집을 차단하기 위해 이 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석벽(石壁)은 고스란히 인근 가라쓰성(唐津城)을 짓는 데 사용됐다.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고 곳곳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성터 위 천수대(天守臺)가 있던 자리에서 현해탄을 굽어보니 역사의 무상함과 섬뜩함이 밀려오는 듯 했다. 이키섬(壹岐島)과 백제 무령왕 탄생지로 전해오는 카카라시마섬(加唐島)이 눈앞에 보이고 멀리는 쓰시마섬(對馬島)까지 풍광이 펼쳐진다. 천수대는 조선 정벌의 총본산인 히젠 나고야 성의 중심, 거기서도 최고 지휘본부였던 셈이다. 

 

히젠 나고야성 정문 앞에 박물관이 있다. 지난 1993년 침략과 폐해의 불행했던 과거를 평화의 미래로 바꿔나간다는 취지로 설립됐다. 입구에 친숙한 돌하르방이 있고, 안에 들어서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 있다. 전시실 어귀에는 한국에서 만들어 보낸 거북선이 자리하고 있다. 전시실 곳곳마다 일본어 밑에 자세한 한글 안내문이 붙어 있다.

 

"불행했던 한일 양국의 과거사 인식이 각각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역사적 무관심입니다.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배우다보면 오해는 풀리고 앙금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두 나라는 이제 새로운 선린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오전 9시 30분 CNB미디어 문화탐방 일행을 맞은 히로세 유이치 박물관 기획보급계장은 유창한 한국어로 한일 양국 과거사를 친절하게 들려줬다.

 

일본 문화탐방 첫 날인 1월 20일, 예정에 없던 귀한 손님을 뜻밖에 만났다. 백제 망명자들이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다자이후(太宰府) 일대 수성(水城)을 둘러볼 즈음, 시게루 아시카리 다자이후 시장이 불쑥 다가왔다. 홀로 경차를 운행하고 가다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급히 차를 세운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방문했는지 등 몇 가지를 묻더니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더욱이 성 복원 책임자를 불러와 일행에게 상세한 설명을 들려주게 했다. 공직자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봉사행정을 이곳 열도에서 접하니 느낌이 달랐다.   

 

다자이후 시장(市長), 수성(水城) 둘러볼 즈음 친절하게 다가와 인사

 

삼국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와 가야, 그리고 일본은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을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이 가운데 백제와 일본의 동맹관계는 탄탄했다. 663년 나당연합군과 백제·일본 연합군이 충돌한 백촌강 전투 당시 야마토 정권은 군선 800척과 군사 2만 7000명을 지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패한 백제는 멸망했고, 많은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수성 등 여러 문화유산을 남겼다.

 

▲CNB미디어 일본 속 한국 문화탐방단 일행이 다자이후(太宰府) 일대 수성(水城)을 탐방할 즈음 시케루 아시카리 다자이후 시장(완쪽에서 두 번째)이 다가와 인사하고 있다. 수성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온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았다.

네 개로 구성된 일본 열도 가운데 규슈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라 다양한 교류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특히 후쿠오카 남쪽 다자이후 시는 과거 규슈의 중심지였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유일한 평야지대인 이곳에 물을 이용해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토성과 도랑을 만든 것이 수성이다. 백제식 수리기술이 일본에 전승된 것이다. 당시 길이가 1.2km에 달했고 폭은 최대 80m나 됐다고 한다. 성 밑에 수로를 설치했기에 수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수성은 1차 방어선이었고, 이것이 무너졌을 때를 대비한 성이 대야성(大野城)이었다.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면 후쿠오카 시내가 잘 내려다보이는 확 트인 고원이 나온다. 둥글게 휜 절벽 밑으로는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근처에는 창고 터도 보인다.

 

일본식 성은 평지에 세워지고 주변은 해자라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대야성을 일본인들은 조선식 산성으로 부른다. 이곳에 사왕사(四王寺)가 들어서면서 대야산은 사왕사산으로 불리었다. 당시 다자이후는 나라나 교토처럼 바둑판 식의 계획 도시로 발전했다. 그 흔적이 다자이후 청사 터의 웅장한 초석에 남아 있다. 청사 터 너머로 사왕사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일본 문화탐방 둘째 날, 일본 도자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이삼평(?∼1655)을 찾아 나섰다. 일본의 도자기 역사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에 의해 시작됐다고 하지만 이전에도 일본 토기는 있었다. 조선인이 일본에 전파한 기술은 자기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도기는 보통 1000도에서 굽지만, 자기는 1300도 이상에서 굽는다. 그 300도의 차이를 당시의 일본인은 극복하지 못했다. 이밖에 일본인은 자기의 원료로 쓰이는 돌을 가늠하는 눈이 없었다. 자기를 빚으려면 질 좋은 고령토(백토) 원석을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

 

일본 도자기 신 이삼평이 발견한 고령토 광산, 국가사적으로 보존 

 

임진왜란 때 끌려온 이삼평의 최대 업적이 바로 우수한 고령토 광산을 발견한 것이다. 그 광산이 있는 마을이 아리타(有田)이다. 이삼평은 원석을 찾아 몇 년을 헤매다 1616년쯤 이즈미야마(泉山)에서 고령토 광산을 찾아냈다. 그 현장이 일본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보전되고 있다. 일행이 찾은 광산은 놀라웠다. 거대한 산 하나가 통째로 파헤쳐져 있었다. 400년 만에 산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이곳에는 광산을 지키는 신사가 있고, 이삼평을 모시는 신사가 따로 있다.

 

▲일본에서 '도자기 신'으로 불리는 이삼평을 기리는 탑. 뒤로 그가 발견한 고령토 광산이 보인다. 400년 만에 산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모습이다.

당시 조선 도공들을 첩첩산중에서 외부와 접촉을 일절 차단 당한 채 도자기만 빚었다. 여기에서 생산한 도자기는 모두 일본 황실이 가져갔다. 그래서 이 마을의 별칭이 비요(秘窯)의 마을, 즉 비밀 가마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왼쪽 산기슭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여기에 조선 도공 800여 명을 모신 도공무연고탑이 있다. 마을 여기저기에 버려진 조선 도공의 무덤이 안쓰러워 1939년 주민들이 비석을 한데 모아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일본 문화탐방 셋째 날, 가라쓰 요부코(呼子)항에서 훼리선으로 20분 만에 도착한 섬 가카라시마(加唐島)에는 백제 25대 왕 무령왕(462∼523)의 탄생 신화가 전해진다. 개로왕은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임신한 부인과 동생 곤지를 보냈는데, 규슈에 인접한 이 섬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단다. 섬 토박이이자 훼리선사 대표인 사카모토 씨가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그는 “한일 양국을 잇는 역사적 현장을 찾아주셔서 고맙다. 어렸을 때부터 여기에서 한국의 높은 사람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안내를 시작했다.

 

항구에서 왼쪽 언덕 200여m 쯤에 백제 무령왕 탄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공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2006년 6월 25일에 건립됐다. 공주 무령왕릉의 아치형 전실(磚室) 형태를 형상화했고 익산의 화강암으로 제작했다. 기념비 주변은 이곳을 찾은 한국인들이 방문 날짜와 이름을 조약돌에 적어 가지런히 놓아 멋진 화단을 꾸몄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목관과 같은 금송(金松) 가카라시마에 식수

 

기념비로부터 500여m 정도 언덕길을 오르니 무령왕 탄생지 동굴인 오비야우라는 표석이 보인다. 조금 더 길을 따라 내려가니 해안가 작은 동굴에 ‘제25대 백제 무령왕 탄생지’라는 목판 표지판이 있고 동아줄이 걸려 있다. 무령왕이 이곳에서 태어나자 근처 우물에서 첫 목욕을 시켰다고 한다.

 

▲백제 무령왕의 탄생지로 전해오는 가카라시마 동굴 앞에서 이 지역 토박이 사카모토 씨(가운데)가 '일본서기'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목관이 일본 열도에서만 자라는 금송(金松)이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탄생지 가까운 언덕에 일본의 금송인 고마야키(高野槙) 한 그루를 식수해 놓은 것이 보인다. 무령왕의 탄생설화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등장하지만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가카라시마는 현재 200명 정도가 살고 있는 작은 섬으로 약 2만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CNB미디어가 1월 20~23일 일본 규슈 서북쪽 일대에서 진행한 제1회 일본 속 한국 문화탐방에 부인과 아들 등 가족과 함께 참가한 김기덕 씨(49·변호사)는 “짜임새 있는 일정과 품격 높은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문화탐방 프로그램에 자주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CNB미디어가 주최한 이번 행사는 삼성, CJ, 한화, KB국민은행이 협찬했고 휴메인여행사가 진행했다. 제2회 중국 속 한민족 문화탐방은 오는 6월 9일(목)부터 12일(일)까지 3박4일간 열린다.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중국 산동성 일대에 깃들어 있는 우리 선조들의 영혼과 발자취를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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