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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두 명은 사형하라”…40년전 ‘건국대 항쟁’, 진화위 결정문 단독입수(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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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25.06.30 09:26:25

민주화 시위→용공(容共) 사건으로 조작
전두환, 직접 연행자 사법처리 방침 지시
진실화해위, 21개월간 방대한 조사 벌여
“국가가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하라” 권고
39년간 ‘빨갱이’ 오명…명예회복 길 열려

 

1986년 10·28건대사건(일명 건국대 항쟁) 당시 농성 학생들이 건물 벽에 쓴 글을 훗날 건국대 교정 바닥에 새긴 비석. (사진=도기천 기자)

CNB뉴스가 지난 2022년 12월 단독 보도([단독] “구속자 1288명”…‘건국대 항쟁’ 그날의 진실 드러난다)한 ‘1986년 10·28건대사건(일명 건국대 항쟁)’에 대해 국가조사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공식 조사에 착수한 지 약 2년여 만에 사건의 총체적 실체가 드러났다. 진화위는 지난달 20일 이 사건을 전두환 정권에 의한 ‘불법구금 인권침해’로 판단,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에 CNB뉴스는 A4용지 47쪽 분량의 진화위 결정문 전체를 단독 입수, 여기에 관련자 인터뷰를 더해 2회(상,하)에 걸쳐 연속 보도한다. 상(上)편에서는 당시 사건을 정부가 조작한 증거와 배경, 고문·폭행 등 관련자들에게 가해진 인권탄압 실상을 다룬다. 하(下)편에서는 사건 이후 피해자들의 후유증, 교도소 내에서의 인권침해, 건국대학교 측 피해액, 재심청구·국가보상 문제 등에 대해 보도할 예정이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10·28건대사건, 건국대사태, 건대민주항쟁, 건대농성사건 등으로 불리는 10·28건대항쟁(이미 사건 당사자 중 일부가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만큼, 용어를 ‘건대항쟁’으로 부르기로 한다)은 1986년 10월28일~10월31일 3박4일 간 건국대 교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 사건이다.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 2000여명 학생들이 건국대 캠퍼스에 모여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을 가졌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내무부치안본부, 안기부, 보안사 합동진압작전인 ‘황소30’을 시행했다. 애학투련 발족식 도중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학내에 진입했고, 학생들은 경찰을 피해 본관 등 5개 건물로 피신했다.


학생들은 4일 간 경찰과 대치하다 헬리콥터와 최류탄, 물대포(소방호스)를 동원한 대대적인 진압에 의해 1487명(이후 체포된 이들까지 포함하면 1525명)이 연행돼 1288명이 구속됐다. 단일 사건 구속자 수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당시 언론들은 이들을 ‘좌경용공분자’, ‘공산혁명분자’, ‘폭도’ 등으로 보도했고,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살아야 했다.

 

건대항쟁 4일째인 1986년 10월 31일, 경찰 사복체포조(일명 백골단)가 항생들이 농성 중인 건물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제공)

이번 진화위 결정문에는 당시 정권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경찰을 동원해 시위 학생 1200여명을 불법구금한 증거와 조사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을 고문·폭행한 사실,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사법처리 방침을 지시한 점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진화위 결정문에 인용된 여러 자료를 보면,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시위를 좌경·용공 소요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건대항쟁이 발생했다.

 

국가조사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1986년 10월 건국대 사건 공식조사보고서(결정문).

1986년 4월에 보안사가 작성한 ‘학원면학분위기 저해요인 배제 대책’에 따르면, 안기부는 일명 ‘학원선진화계획’을 수립해 학원소요와 관련된 대응방침 및 처리기준을 정했다. 이 시기 안기부는 학생시위에 대한 대응방안을 총괄했으며, 경찰 경력의 운용까지 조정·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단순 집회’는 대학당국에 위임함으로써 사실상 학내 시위를 용인하는 한편, ‘극렬 사태’나 ‘학외 진출’에 대해서는 엄단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특히 대학 간 연합시위를 ‘일절불승인’하고 ‘주변 통로차단 및 사전병력 배치’로 원천 봉쇄해 집결을 와해한다는 지침을 수립했다.

당시 이를 총지휘한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건대항쟁 직후인 1986년 11월 3일 전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학생들에게 방화, 파괴, 침입 등의 죄목을 적용하라”고 구체적인 사법처리 방침을 지시했다. 다음은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 김성익의 증언으로 재구성한 전 대통령과 강우혁 정무2수석 간의 대화.

“건국대 사건은 ‘공산혁명분자 폭력 난동 사건’으로 명칭을 통일해서 쓰겠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부상자 49명을 제외하고 1274명을 구속처리 하였습니다”(강우혁)

“이번 경우에는 학생들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걸지 말고 방화, 파괴, 침입 등의 죄목을 적용토록 해요. 집시법을 적용하면 정치성을 띄게 되어 정치범이 되고 말아요”(전두환)

이에 따라 안기부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엄단 방침을 세웠다. 박철언 전 안기부장 특보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장세동 안기부장은 주동자에 대해 ‘사형(死刑)’까지 언급했다.

“데모하는 학생들은 공부를 안 시키겠다는 의지를 과시해야 한다. 건국대 사태와 관련해 한두 명 정도에게는 사형 선고까지 고려하라. 화염병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이번 기회에 법률을 통과시키도록 하라”(장세동)

애초 검찰은 대규모 구속보다 등급별로 분류해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만 구속수사할 예정이었으나, 이 같은 흐름에 따라 단순가담자 1200여명까지 구속수사하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공산혁명분자에 의한 폭력난동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같은 정부기관들의 사건조작에 따라, 경찰은 불법구금·고문·폭행을 자행했다. 당시 서울시립대 3학년 복학생이었던 김문수는 진화위 조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1986년 10월 31일 체포된 후, 서울 영등포경찰서에서 자신들을 치안본부 대공과 형사라고 밝힌 6명이 저에게 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쓰게 하고 ‘너 말 안하면 병신된다’고 협박하며 고문과 폭행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조사가 시작되면 무차별적인 구타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제압당한 상태에서 제가 조서를 작성하면 그 내용을 읽어보고 다시 고문과 폭행이 시작됩니다. 고문은 ‘관절꺾기’라고 해서 수갑으로 묶어둔 채 두손 또는 허리를 꺾는 행위를 지속하였습니다. 허리를 꺾는 고문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수갑 묶인 손을 머리 뒤로 가게 한뒤 경찰봉을 끼워 팔과 어깨를 꺾거나, 무릎을 꿇게 한 뒤 발로 허벅지를 밝는 등의 고문도 수시로 이뤄졌습니다. (유치장에서) 독방 조사실로 옮겨진 이후 저녁 7시부터 새벽까지 며칠간 계속 되었습니다.”

 

건대항쟁 일지. (자료=진화위)

경찰은 체포된 학생들을 등급별로 분류했다. 연행된 1525명을 A급(주동자) 122명, B급(적극가담자) 968명, C급(단순가담자) 110명, D급(가담기도자) 32명, E급(무험의) 191명 등으로 나눴다. 이중 A급에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데 초점을 맞췄고, D급까지 구속 처리했다. 이렇게 단순가담자까지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적용법조를 변경하다 보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결과 법적 시한 안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못했다.

당시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긴급구속한 경우라도 48시간 또는 72시간 이내에 법원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즉시 석방해야 한다.

진화위는 당시 서울지검이 발표한 구속자 명단과 경찰청 보안문서고 존안자료, 개인별 구속영장, 수용자 신분장, 형사사건부 등을 통해 건국대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이 1986년 10월 28일부터 10월 31일 오전 10시20분 사이에 현장에서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은 11월 3일 오후 5시부터 청구되었음을 확인했다. 진화위는 연행자들이 최소 4일 이상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경찰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검찰과 법원은 이런 불법구금 사실을 알면서도 형사소송법을 위반한 채 조사와 재판을 이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진화위는 이 사건이 헌법이 보장한 신체 자유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중대한 인권침해라며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지난달 20일 권고했다. 2022년 10~12월 총396명으로부터 진실규명 신청을 접수받아 2023년 8월 조사를 개시한 지 21개월 만이다. CNB뉴스는 앞서 이 사건에 대해 수차례 연속보도한 바 있다.

 

건국대 교정의 ‘건대항쟁 기림상(象)’. 1986년 10·28건대사건(일명 건국대 항쟁)을 기리자는 뜻에서 건대 동문들이 상을 세웠다. (사진=도기천 기자)

그렇다면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둔갑시켜 혹독하게 탄압한 이유는 뭘까?

건대항쟁계승사업회 조남득 사무처장은(당시 건대 3학년생)은 CNB뉴스에 “전두환 정권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학생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몰아 신민당(당시 야당)과 국민들로부터 분리해 민주화운동에 균열이 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또 하나는 학생지도부를 모조리 체포해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이다. 둘 중에 어느 하나만 성공해도 전두환으로서는 중대한 위협요소를 제거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1986년은 신민당 등 야당과 재야·대학가의 직선제 개헌 요구가 절정에 이른 시기다. 당시만 해도 대통령은 국민투표가 아닌 정부가 만든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됐다. 이에 민주화운동 세력은 5.3인천시위, 8.30자민투민민투 사건 등을 벌이며 독재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이 학생들의 건대 시위를 용공(容共) 사건으로 조작한 것이다.

건대항쟁계승사업회 최동근 공동위원장은 CNB뉴스에 “당시 건대항쟁 참가자들은 폭도, 공산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살아야 했고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며 “이번 진화위 결정은 국가가 처음으로 진실을 규명해 명예회복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며, 이를 계기로 사건 실체가 낱낱이 밝혀져 이제라도 피해자들이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 하(下)편에서는 피해자들의 후유증, 교도소 내에서의 인권침해, 건국대학교 측 피해액, 재심(再審)과 국가보상 문제 등에 대해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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