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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감독에게 고대마야문명은 어떻게 보일까?

[개봉작순례]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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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기자 |  2007.02.13 15:30:24

지금 극장에서는 호주출신의 배우이자 감독인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가 상영되고 있다.

멜 깁슨의 영화는 그가 배우로 출연한 <매드맥스>와 <브레이브 하트>를 재미있게 봐서 기대를 많이 하고 관람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못 본 탓에 감독으로서 멜깁슨의 역량도 매우 궁금했다. <아포칼립토(Apocalypto)>는 그리스어로 '계시,전조'라는 뜻이라고 한다. 감독으로서 그의 필모그래피에 대한 전조적인 작품이 <아포칼립토>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1.
<아포칼립토>는 멸망 직전의 마야문명과 그 주변권 부락을 배경으로 한다. '표범발'은 평화롭게 임신한 아내와 아들, 아버지 그리고 부락 사람들과 어울려 사냥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고있다.

그런 '표범발'의 마을에 마야문명의 노예사냥꾼이 나타나 마을민을 끌고 간다. 여자는 노예로 팔려가고, 남자는 인신공양의 재물이 되어서 심장이 뜯겨 나가고,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런데, '표범발'은 때마침 벌어진 개기일식으로 풀려나고 이어서 대 추격전이 벌어진다. 고향으로 달리는 '표범발'과 추격자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멜 깁슨 감독은 미국에서도 보수주의적인 정치신조와 독실한 기독교 원리주의 신앙를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겸 배우이다. 이런 그의 눈에 고대 마야문명은 어떻게 보일까?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답이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상 그에겐 유색인종이 건설한 고대문명을 문화적 상대주의로 평가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오리엔탈리즘의 렌즈가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덧씌워져 있는 것이다.

<아포칼립토>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유명한 사학자 듀란트(Durant)의 글이 한 문장 등장한다. "위대한 문명은 정복되지 않는다. 단지, 내부붕괴로 멸망한다".

아마도 이 문장은 문명의 발전과 멸망에 관한 멜 깁슨 감독의 생각과 관점을 잘 보여주는 문장인 것 같다. 그런데, 그의 문명관이라는 것이 영화에서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조악하고 편협하다. 심지어 인종주의의 그림자마저 보인다.

멜 깁슨 감독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선조들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멸망당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진 마야문명의 멸망 원인을 마치 그들의 야만적 관습과 이교도적인 문화에 따른 사회붕괴의 탓 정도로 돌리고 있는 것 같다.

백인우월주의의 원조격인 호주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기독교 원리주의 신앙을 신봉하는 멜 깁슨에게는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사실, 그런 징후는 기사로만 접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나타났다. 기독교 문명의 필터로 들여다 볼 때 고대문명이란 숭고와 장엄의 대상이 아닌 관음증적 엿보기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포칼립토>의 중반을 이끄는 '목잘린 시체의 산'을 보라! 그 장면은 때론 크메르루즈의 학살까지 연상시키면서, 백인우월주의·보수주의·기독교원리주의가 결합된 세계관의 시선을 대표한다.

무의식의 역사에서 학살의 모티브가 주는 의미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굳이 그 학살의 자취를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기표로 치환하는 멜 깁슨의 의도에는 그의 정신적 현재성까지 의심케했다.

그외에도 <아포칼립토>는 역겨운 장면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비교적 적은 4천만불의 제작비로 최대수익을 실현하려면 대중의 저급한 취향에까지 호소해야 하는 것 같다. 기실, 영화제작에서 물적기반이 탄탄하지 못한 경우 그 성취에서 제한된 수준까지 밖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
<아포칼립토>에서 평화로운 '표범의 숲'은 마야문명인들에 의해서 습격을 당하고, 마야문명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서구인의 공격을 당한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의 오래된 영화문법에서 평화로운 마을은 인디언의 습격을 당한다.

대동소이한 서사구조가 <아포칼립토>에서도 재연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습격과 복수, 새 출발의 서사구조가 <아포칼립토>에서는 조금 뒤틀리고 있다. 마치 마야인의 역사가 서구인의 침략으로 뒤틀렸듯이.

우선, 공동체를 표상하는 '표범발'의 마을은 마야인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된다. 그러나, '갖은 난관을 겪은 끝에' 표범발의 가족만은 무사히 새출발(아포칼립토) 한다. 가족주의 정서로 표상되는 미국의 보수적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미국 영화 전통의 일부인 '직접적 희생'의 제의없이 해피엔딩에 이르러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서사구조를 무너뜨리고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영화의 후반부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의 긴장감이 서서히 떨어진다. 그리고, 그 자리를 영화기술,즉 카메라 워킹과 편집이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표범발'의 복수라는 것이 '아버지의 피살'이라는 이유마저도 잊어버렸는지 너무 맥이 빠진다. 우리의 '선한' 영웅을 계속 '선하게' 내버려 두기 위해서 우연적인 사건으로 추적자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조는 어처구니 없게도 길에서 만난 전염병 걸린 소녀의 저주같은 예언이다.

대체로 <아포칼립토>의 서사구조는 분석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오랜 액션연기로 다져진 멜 깁슨 감독의 잔 테크닉 연출 정도이다. 하지만, 영화를 테크놀로지와 기교들로 덧씌운다고 해도 서사구조가 무너진 마당에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거기에 첨가되는 것이 앞에도 언급한 센세이셔널하고 폭력적인 영상이다.

'멍청한(?)' 관객에게 잔 기술과 자극적 영상으로 최면거는 것은 할리우드의 너무나도 고전적인 기법이다. 그런데, 사실 관객은 그렇게 멍청하지가 않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관객들은 대체로 "어디가서 권하지는 못 하겠다"라던가 "내 돈 내고는 못 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워낙 잔인한 컷이 많아서인지 극장복도에 누군가 '오바이트(토)'를 해놓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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