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기천기자 |
2014.03.07 12:04:53
▲재판중이거나 형을 선고받은 대기업 총수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진=연합뉴스,CNB포토뱅크)
오너 중심의 경영이 불가피한 우리나라 대기업의 특성상 총수들에 대한 잇단 실형 선고로 인한 리스크는 투자는 물론 고용시장까지 냉각시키고 있다.
최근 실형을 선고 받았거나 재판이 진행 중인 대기업들의 말못할 사정을 CNB가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M&A활성화 방안’ 무색…시장엔 매물만 쌓여
회장 부재 기업 “현상유지도 힘들 판”…투자 뒷전
SK·CJ·한화·LIG·오리온·동양…오너리스크에 ‘휘청’
박근혜정부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기업규제 완화와 투자활성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보건·의료·서비스분야 투자활성화 대책을 내놓은데 이어, 6일에는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았던 규제를 대폭 풀어 인수합병(M&A) 시장을 2017년 70조원까지 확대하겠다는 내용의 ‘인수합병 활성화 방안’을 내놨다.
현재 재무구조 개선을 추진 중인 주요그룹의 자산, 계열사 매각을 서두르겠다는 의미다. 또 ‘규제총량제’를 우선적으로 도입해 기업활동에 부담을 주는 규제를 제거해 나갈 방침이다. 규제 신설이나 강화시 기존 규제를 폐지 또는 개선하는 방향으로 ‘규제총량’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부의 바램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오너 일가가 재판대에 올라있는 대기업들은 인수·합병 등 투자는 물론 신사업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미 시장에 매물로 나온 기업들도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 SK, CJ, 한화, 오리온, LIG, 동양, 효성그룹 등의 오너가 실형을 선고 받았거나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들 기업의 총수들은 효성과 LIG를 제외하곤 그룹 내 모든 계열사의 등기이사직까지 사임했다. 사실상 경영에서 손을 뗀 것이다.
구자원 LIG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은 아직 유죄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등기이사직은 유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재판이 마무리되면 이사직을 사임할 것으로 보인다.
SK, 최태원 회장 공백…신사업 투자 ‘올스톱’
이들이 경영일선에서 한발 물러남으로써 해당 기업의 ‘오너리스크’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SK그룹 계열사 사옥.(사진=CNB포토뱅크)
지난달 22일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박성욱 SK하이닉스 대표는 동부하이텍 인수 의향이 없다고 밝혀 시장의 기대를 저버렸다. 동부하이텍은 각종 전자제품에 쓰이는 아날로그 반도체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으로 지난 2012년 매출액 5908억원을 기록한 알짜 기업이다. 최근 유동성 위기에 처한 동부그룹이 매물로 내놨다.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SK텔레콤의 통신사업과 시너지를 내기 위해 반도체 사업진출을 서둘러 왔기 때문에 SK를 인수 주체 1순위로 점쳐왔다.
앞서 SK는 지난해 STX에너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가 9월 항소심 선고에서 최 회장이 실형을 선고받자 인수전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최 회장이 공석인 상태에서 계열사 사장들이 수천억원대의 투자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LIG, 구자원 회장 일가 부재…손보 매각 ‘안갯속’
LIG그룹은 지난달 11일 항소심에서 구자원 회장이 가까스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사실상 그룹을 이끌고 있는 두 아들은 실형이 선고됐다.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 됐던 구자원 회장은 고령(79세)인데다 간암으로 투병 중인 점이 고려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장남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은 징역 4년, 차남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차남 구 전 부사장의 실형 선고는 충격이었다. 검찰은 재판부의 중형 선고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LIG그룹 합정동 사옥.(사진=CNB포토뱅크)
LIG 측은 그동안 CP 피해자들의 보상에 온 힘을 쏟아왔다. LIG그룹은 지난해 구 회장을 비롯한 대주주 일가가 사재를 털어 마련한 돈으로 CP 투자자 700명 전부와 합의해 피해액 2100억원을 돌려줬다. 이 과정에서 그룹 전체 자산의 84.1%를 차지하고 있는 LIG손해보험을 매물로 내놨다.
LIG그룹 관계자는 “LIG손보 매각이 진행 중이라 아직 자금이 들어온 건 아니지만, 구자원 회장이 사재를 털어 피해자 보상을 100% 완료했다”며 “추후 LIG손보 매각에 따른 자금은 피해보상금 마련으로 인해 발생한 채권 등을 갚는데 쓰일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LIG손보가 매물로 나온지 4개월을 넘기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인수주체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장에서는 롯데그룹, 동양생명, 메리츠금융, KB금융 등이 인수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 매각방식도 정하지 못한 상태라 누구 품에 안길지를 점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시장에서는 범 LG그룹 일가에 잠시 경영권을 맡겨두는 파킹 딜(Parking Deal) 가능성, 우선매수청구권 행사 여부 등 변수가 존재하지만 구자원 회장은 아직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구 회장은 LG그룹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동생인 고(故) 구철회 회장의 장남이다. 구인회 회장의 4남이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이다. 조정호 메리츠 전 회장은 구인회 회장의 차남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둘째 사위다. 이런 점에서 범LG가(家) 금융기업인 메리츠와 LB인베스트먼트가 ‘파킹 딜’과 관련해 시장의 견제를 받고 있다.
결국 구 회장이 나서서 돌파구를 제시해야할 상황이지만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데다, 아들들 마저 ‘잉여의 몸’이 된 상태라 매각 향배가 안갯속이다.
LIG손보 관계자는 “매각주관사인 골드만삭스에 일임한 상태며, 어떤 식으로 매각이 진행될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고 전했다.
오리온, 알짜사업 ‘스포츠토토’ 접어야 할 판
오리온그룹은 지난 4일 조달청이 체육진흥투표권발행사업 수탁사업자 선정 기준을 공표하면서 실의에 빠졌다. 사업 참여자의 도덕성 기준이 크게 강화돼 현재 수탁 운용하고 있는 스포츠토토의 사업 재참여가 쉽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오리온그룹 사옥.(사진=CNB포토뱅크)
조달청의 사업자 선정기준에 따르면, 제안업체의 지분비율 5% 이상인 구성주주와 구성주주의 대표이사, 구성주주의 최대 주주와 그 특수관계인은 최근 3년 이내에 금고 이상의 형사처벌을 받은 사실이 없어야 한다. 도덕성과 사회적 신용요건에 대한 평가 배점은 1천점 중 60점이나 된다. 사업 운영부문 500점 중에서는 절대적 비중인 셈이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은 지난해 4월 300억원대의 배임 등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확정판결 받은 바 있다. 지난해 3분기 공시에 따르면, 담 회장은 오리온 지분 12.91%를, 부인 이화경 오리온 사장은 14.49%지분을 갖고 있다. 오리온은 스포츠토토 지분 66.64%를 보유한 대주주다.
따라서 사실상 현재 사업자인 스포츠토토와 최대주주사인 오리온이 입찰에 제한을 받게 됐다. 오리온 뿐 아니라 SK, 한화, CJ 등 실형이 확정됐거나 재판 중인 대기업들도 입찰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투자를 촉진한다면서 각종 규제는 더 강화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며 “기업투자의 전제가 수익인데, 힘든 사업은 규제를 풀어주고 알짜사업은 규제를 강화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화그룹 사옥.(사진=CNB포토뱅크)
한화그룹은 지난달 11일 배임 등 혐의로 재판을 받아오던 김승연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김 회장이 ㈜한화, 한화케미칼, 한화건설, 한화L&C, 한화갤러리아, 한화테크엠, 한화이글스 등 자신이 대표이사로 있는 7개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으면서 선장없는 항해를 하고 있다.
김 회장의 사임으로 한화는 당장 100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이라크 재건사업 추가 수주에 적신호가 켜졌다. 한화건설은 김 회장의 진두지휘 하에 2012년 우리나라 해외건설 역사상 최대 규모인 80억달러(9조원) 규모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공사를 수주한 바 있다.
이라크 정부는 오는 2017년까지 재건사업으로 주택 800억달러(한화 약85조원), 교통인프라 460억달러(한화 약49조원)을 포함해 총 2750억달러(한화 약293조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화학과 건설부문이 그룹 전체 매출의 80% 가까이를 차지하는 한화그룹은 이라크 사업의 추가수주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김 회장의 사임과 건강악화로 사업 전망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화건설 관계자는 “무엇보다 김 회장의 건강이 제일 문제”라며 “풀려나신 뒤에도 오직 치료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법무부에 사회봉사명령 연기 신청을 했으며, 법무부는 건강상태를 고려해 이를 받아들였다. 김 회장은 구속 기간 동안 당뇨, 만성 폐질환, 우울증 등을 앓아왔다.
▲CJ그룹 사옥. (사진=CNB포토뱅크)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주요 투자계획 상당수 가 지연되거나 중단된 상태다.
CJ제일제당 생물자원사업부문의 경우, 지난해 베트남과 중국에서 각각 사료업체 인수를 추진하다 의사결정 지연으로 최종 인수 단계에서 좌초됐다. CJ대한통운도 미국과 인도 물류업체 인수를 검토하다 협상 단계에서 무산됐다. 지난 수년간 글로벌 시장 확장을 추진해온 CJ오쇼핑 역시 M&A 차질로 상당수 계획이 보류되면서 추가 도약에 발목이 잡혔다.
CJ그룹의 뿌리인 CJ제일제당도 바이오 사업부분의 실적악화 등으로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30% 급감하는 등 그룹 전반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CJ계열사의 한 관계자는 “분위기가 크게 위축돼 있으며, 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7월 탈세와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아왔으며 지난달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이 회장은 지병인 만성신부전증이 악화돼 최근 서울대병원에서 신장이식수술을 마친 뒤 투병 중이다.
시장에 매물 넘쳐…‘경제살리기’ 무색
이처럼 사법처리 대상이 된 주요 대기업들이 줄줄이 투자계획을 보류하고 있어 정부의 경제활성화 정책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 따라 경제살리기에 올인하고 있지만 대기업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정부는 2010년을 기점으로 하락세로 전환한 국내 M&A시장을 활성화시켜 전체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현재 분위기에서 투자는커녕 현상유지 하기도 힘들다는 게 오너공백 상태인 기업들의 목소리다.
특히 이들 기업의 투자 보류로 금융, 건설사 등 부실기업 매물이 소화 되지 않은 채 시장에 쌓이면서 경제 전반에 ‘동맥경화’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금융, STX, 동양그룹, 동부그룹, 현대그룹, LIG 등 대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시장에 매물로 내놓은 기업만 100여곳이 넘지만 M&A가 성사된 사례는 손에 꼽힐 정도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정말 경영을 잘못했거나, 회사자금을 횡령해 사금고를 채웠다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겠지만, 경영상 문제에 가까운 배임혐의에 대해서도 엄중 처벌하는 분위기에서 과감하게 투자를 늘리기가 쉽지 않다”고 전했다.
총수가 재판중인 대기업의 한 임원은 “오너 일가가 회사를 경영해온 우리나라 재벌기업들의 특성상 (회장 부재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꾼다는 건 상당한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며 “(재판부가) 최소한 경영 유지는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 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