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목표는 ‘더불어 잘사는 경제’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사람 중심’으로 전환해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나누자는데 경제정책의 무게를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제 보장, 본사의 횡포로부터 가맹점 보호, 대기업과 골목상권의 상생, 재벌지배구조 개편 등을 국정운영의 우선 과제로 추진 중이다. 이에 CNB는 문재인 정부의 주요 기업정책들을 분야별, 이슈별로 나눠 연재하고 있다. 이번 주제는 대기업의 대표적 갑질인 중소·벤처기업을 상대로 한 ‘기술탈취’ 행위다. 이를 근절하기 위해 당정이 징벌적 손해배상을 높이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CNB=이성호 기자)
▲대기업의 중소·벤처기업 보유 ‘기술탈취’ 행위에 메스를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진=참여연대)
대기업, 중소벤처 특허 도용 잦아
‘갑’의 보복 두려워 입다문 ‘을’들
여권, ‘기술탈취 원천봉쇄법’ 마련
지난 7월 공정거래위원회는 하도급업체의 기술자료를 유용한 두산인프라코어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3억7900만원을 부과하고, 관련 직원 5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두산인프라코어는 굴삭기 부품의 납품 가격을 낮출 목적으로 납품단가 인하 요청을 수용하지 않은 하도급업체의 기술자료를 새로운 공급처가 될 업체에게 넘겨 이 회사가 해당 부품을 개발토록 했다.
또한 지난달 23일 송갑석 의원(더불어민주당) 주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대기업의 기술탈취·기술편취 피해사례 발표 및 근절 방안 모색 토론회’에서는 기술유용 의혹으로 공정위·대전경찰서·중소벤처기업부 등에서 조사가 진행 중인 현대로템, 현대중공업의 사례가 소개됐다.
이 같은 대기업의 중소·벤처기업을 상대로 한 ‘기술탈취’ 행위는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올해 1월 중소기업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으로부터 기술자료를 요구 받은 경험이 있는 경우가 65%에 달했다. 이중 상당부분이 유용·도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대기업의 갑질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는 중소기업의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탓이다. 2017년 중소기업 실태조사에 의하면 중소제조업체의 41.9%가 수급기업이고 이들 매출액의 81.4%가 위탁기업에 의존하고 있는 구조였다. 이래서 대기업의 기술자료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부당함을 알면서도 용기 있게 나선 경우는 드물었다. 지난해 8월 중소기업중앙회가 기술자료를 요구 받은 경험이 있는 117개 중소하도급업체(수급사업자)를 대상으로 ‘기술탈취 실태 파악을 위한 심층조사’를 실시했지만 인터뷰(방문 또는 전화)에 응한 업체는 단 9곳에 불과했다. 응답한 9개 업체도 그나마 자세한 설명은 거부했다. 갑을관계 상 거래중단 등 보복조치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관련법도 갑에게 유리한 구조다. 기술분쟁이 발생해 소송으로 가게 될 경우. 중소기업은 피해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한다. 현실적으로 특허권자인 ‘을’이 침해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특허침해소송에서 인정되는 손해배상액의 중앙값이 6000만원 미만으로 GDP의 규모를 감안하더라고 미국에 비해 1/6 수준에 불과해 대부분 소송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다.
또 공정위에 신고 돼 처리되는 건수가 매년 10건 미만에 불과하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기술유용 사건에 대해 공정위의 조사가 시작되면 대기업이 중소기업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등 회유에 나서거나, 하도급법에서 기술유용이 발생하는 범위를 너무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처럼 법과 제도가 미비한 상황이다 보니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중소기업을 압박해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는 관행이 만연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3배→10배로 강화
이에 당정이 손잡고 메스를 가하기로 해 추이가 주목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억제책의 일환으로 침해혐의 당사자가 자사의 기술이 피해당한 중소기업의 기술과 무관함을 입증하도록 하는 입증책임 전환 및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강화할 방침이다.
현행 하도급법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3배 배상)가 도입돼 있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으로 기술보호 관련 법률에 모두 적용하고 배상액도 손해액의 최대 ‘10배 이내’로 강화한다는 복안이다.
9월부터 공정위, 특허청, 중기부, 산업부 등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10배 이내)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며 여당에서는 국회 통과를 적극 지원한다는 전략이다.
앞서 국회에는 홍의락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발의한 ‘특허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제출돼 있기도 하다. 이 개정안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특허권을 침해한 사항에 대해 10배 이내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고, 입증책임을 특허권 등의 침해자에게 전환하는 것이 골자다.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산자위 등에 따르면 특허권자 등에 대해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지, 징벌적 배상제를 이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으로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요구된다. 오히려 특허권을 많이 소유할 수 있는 대기업들이 상대적 약자, 경제적 ‘을’들에게 상당한 압력 내지는 또 다른 불공정행위들을 유도할 부작용 가능성도 있다.
또한 입증책임의 전환의 경우에도 손해배상 관련 소송 시 침해사실 및 손해 범위 등 포괄적 범위에서 사실을 증명해야 하므로 모든 입증을 침해자에게 부담하도록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측면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정이 협의를 통해 적극 추진할 요량으로 향후 법안 논의과정이 예의주시 된다.
한편, 박재영 국회입법조사처 산업자원팀 조사관은 CNB에 “보다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술에 대한 가치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하고 계약 전 단계에서부터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손해배상액의 산정 및 그 발생요건이 되는 명확한 기술가치 평가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 아울러 하도급 거래에서 대부분 원사업자(대기업)와 수급사업자(중소기업)간 계약체결을 전제로 해서 기술을 보여 달라고 하는 관행을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얘기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계약이 체결되면 다행이지만 파기됐을 시 피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 조사관은 “자료를 달라고 해서 주기는 했지만 계약이 무산될 시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도급법의 하위법령 등을 강화해 계약체결 전에는 기술자료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고 계약이 성사된 후에만 가능하도록 강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CNB=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