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신작 출시일 맞춰 야근 횡횡
지금은 ‘빠른 미완’ 보다 ‘느린 완벽’
갈수록 노동시간 줄고 임금 개선돼
‘크런치 모드’의 대표 직군으로 알려진 게임사가 노동환경 개선에 나섰다. 게임업계는 그간 개발 마감을 앞두고 초장시간 노동을 하는 크런치 모드를 지속해왔다. 이런 문제점들이 공론화되면서 게임사 별로 노조가 속속 생기기 시작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이 전개됐다. 넥슨 대표까지 크런치 모드를 비판하고 나선 가운데 게임업계는 근무 환경의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있다. (CNB=김수찬 기자)
‘판교의 꺼지지 않는 불’, ‘구로의 등대’.
게임사가 몰린 지역에 붙여진 불명예스러운 별명이다. 게임 개발자들에게 밤샘 작업과 야근은 일상이었고, 출시 기한을 지키기 위해 식사와 수면 등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주 52시간 근무는 ‘꿈같은 이야기’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게임업계는 점차 달라졌다. 노동환경 개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크런치 모드’와 ‘포괄임금제’ 등 악습을 깨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과도한 근로를 원천적으로 예방하고자 개선에 나선 것이다.
게임업계는 크런치 모드를 막기 위해 개발 기조의 변화를 알렸다. 출시 목표 일정에 쫓겨 초과 근무를 하며 ‘불완전한 게임’을 만들기보다, 개발자들을 보호하며 ‘좋은 게임’을 만들겠다는 의지다.
이러한 생각을 가장 먼저 펼친 곳은 게임업계 맏형 ‘넥슨’이다.
오웬 마호니 넥슨 일본법인 대표는 지난 11일 컨퍼런스콜에서 “출시 일정을 확정지으면 투자자들은 단기적인 투자 모델을 구축할 수 있고, 이용자들도 당장은 즐거워할 수 있다”며 “하지만 개발자들에게 잘못된 압박이 가해지고,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보다는 출시 일정을 맞추는 데 급급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넥슨은 출시 시기를 밝히는 대신, 최대한 빨리 최고의 게임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겠다”고 밝혔다. 2분기 ‘어닝 쇼크’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신작을 출시해 단기 수익을 내지 않겠다는 소신 발언이다. 개발자들을 보호하면서 게임의 양보다는 질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호니 대표는 크런치 모드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크런치 모드에 돌입하더라도 여전히 출시가 안될 수 있고, 개발자들의 사기만 떨어질 뿐이다”라며 “이는 이용자들의 실망과 함께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크런치는 게임계에 가장 치명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정헌 넥슨코리아 대표 역시 지난 5일 미디어 쇼케이스를 통해 “‘떳떳할 때 출시하겠다’는 모토로 신작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넥슨의 개발 기조가 바뀌었음을 상징하는 발언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CNB에 “무리한 목표 일정에 혹사당했던 개발자들에게 단비 같은 발언이었다”며 “게임업계 대표주자인 넥슨의 변화로 업계의 게임 개발 기조가 바뀔 것으로 예상한다”고 언급했다.
“워라밸 갖추자” 노조의 오랜 노력 결실
그간 게임업계는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내놨다. 주 52시간 근무 시행에 앞서 도입한 방법은 ‘선택적 근로시간제 도입’과 ‘포괄임금제 폐지’다. 지난 2018년부터 설립된 게임업계 노동조합들과 협의로 이뤄낸 성과다.
‘3N’(넥슨·엔씨소프트·넷마블)을 비롯해 카카오게임즈, 스마일게이트, 펄어비스, 컴투스, 게임빌 등은 2018년에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했다. 월 기본근로시간(8시간×해당 월 평일 일수)을 기준으로 법에서 허용된 월 단위의 최대 근로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직원들이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제도로, 각 회사와 근로자 대표 위원의 합의를 통해 최종 결정됐다.
또한, 조직별로는 의무 근로 시간대가 설정됐으며, 해당 시간대 외에는 직원들이 개인의 누적 근로시간과 니즈에 따라 자유롭게 출퇴근을 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엔씨는 주 52시간 기준 월 최대 근로 시간에 도달한 직원들의 사내 출입을 제한하는 ‘게이트 오프(Gate Off)’ 제도를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포괄임금제도 폐지되기 시작했다. 2017년 펄어비스가 선제적으로 시행했고, 2019년에는 3N과 스마일게이트, 2021년에는 게임빌과 컴투스가 포괄임금제를 없애기로 했다. 연장근무에 대한 수당을 급여 외 추가로 받을 수 있도록 직원들의 보상 수준이 개선된 것이다.
막바지 개발 기간에 유독 바쁜 게임업계 특성상 포괄임금제는 어쩔 수 없는 제도였다고 하지만, 업계에 만연한 ‘공짜 야근’ 악습을 잘라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CNB에 “포괄임금제 폐지 이후 개발 직군부터 비개발 직군까지 임직원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며 “게임 산업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직원들의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해 건강하고 유연한 근무 문화를 조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 게임사 별로 전환배치 제도 개선, 복리후생 및 모성보호 확대 등 복지향상과 더 나은 근로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사 간 합의도 이뤄졌다.
올해에는 임금체계를 대폭 상향하고, 성과에 따른 보상체계도 더욱 강화했다. 아울러, 코로나 환경에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유연한 재택근무를 권고하고 있다.
크런치 폐지, 지속가능성 가져야
노사 간 합의로 이끌어낸 근무 환경 개선 방안은 크런치 모드를 감소시키는 효과를 보였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 1월 발간한 ‘2020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크런치 모드를 경험했다는 업계 노동자의 응답 비율이 2019년 60.6%에서 지난해 23.7%으로 줄었다.
크런치 모드 발생 주기는 11.7주로 나타났으며, 지속일은 7.5일로 2019년에 비해 16일 감소했다. 또한, 크런치 모드를 경험한 노동자 중 70.7%가 크런치 모드 감소 이후 확실한 휴식을 보장받았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업계는 크런치 모드 감소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CNB에 “코로나19로 인해 사업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서 크런치 모드가 일시적으로 감소한 현상일 수 있다”며 “업계 특성상 크런치 모드가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겠지만 근로 환경 개선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CNB=김수찬 기자)